2009년 5월 14일 목요일

밀양박씨 유래


밀양 박씨 (密陽朴氏)  밀양박씨(규정공파) 홈으로

 

 1> 시조 :  박언침[朴彦枕]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밀양(密陽)은 경남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  법흥왕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이 되었다가
757년
밀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때는 밀주로 하였고,그후 1895년 밀양군으로 개칭하였다.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신라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8대군중 박언침으로부터 세계가
이어져, 단일 본관으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임을 자랑하여 왔다.
박씨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밀양박씨는 중시조 언침이 밀성대군에 봉해진 연유로 해서
본관을 밀양으로 하게 되었으며,

 

8세손 언부

문하시중공파

 

 

8세손 언상

도평의사공파

 

 

8세손 언인

좌복야공파

 

 

8세손 언양

밀직부사공파

 

 

8세손 천익

판도공파

 

 

8세손 을재

좌윤공파

 


크게 6파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되었고,
10세손
환(桓)이 영암박씨로 분적하는 등 10여개 본관으로  갈라졌다.

각 계통별로 인맥을 살펴보면, 종파인 8세손 언부가 문하시중과 도평의사를 거쳐 밀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에서 은산군 영균(永均)을 비롯한 13개 파가 형성되었다.

 

밀성부원군 언부의 차남 의신(義臣)의 후손에서는 맏아들 원(元)의 계통과  밀성군에 봉해졌던
척(陟)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원(元)의 8세손 의중(宜中)은 고려 우왕때 대사성과 밀직제학을
거쳐 뒤에 공신에 올랐으며,  문종때 경흥부사
거겸(居兼)은 의중의 손자이며 경빈(景斌)
아들로 성종때 밀산군에 봉해졌다.  
조선 정종의 부마로 지돈령부사에 오른 갱의 7세손
정원(鼎元)이 평안도사를 역임했고,
그의 종손
신규(信圭)는 호조판서를 지낸 후 청백리에 녹선되어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고려 공민왕때 사헌부규정을 역임했던 현(鉉)은 평장사 효신(孝臣)의 8세손으로 조선개국과
더불어 집현전 부제학에 등용되어 수원 부사를 거쳐 안변부사로 나가 임지에서 생을 마쳤다.
특히 그는 성리학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청백리로 칭송을 받았으며, 후대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현(鉉)의  손자
사경(思敬)은 고려조에서  전법판서 겸 상장군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그의 아들
이 공민왕  때 전의판사를 역임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71현(賢)과  함께 개성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강생(剛生)의 손자로 세조때 정난이등공신에 책록되어 응천군에 봉해진 중손(仲孫)은 공조를
비롯한 4조의 판서를 거쳐 밀산군에 개봉되었으며, 그의 맏아들
이 부사를 지냈고,
차남  
미(楣)는 대사간과 예조참의를  거쳐 여지승람을 편찬했으며  시문에 현달했고,
막내
건(楗)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으로 5대의 왕조를 거치면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밀산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찬성공 신생(信生)의 현손 영(英)은  양녕대군의 외손자로 주역(周易)·천문·지리·의술 등에
능통했으며, 무예에 뛰어나 용맹을 떨침으로서 중세의 명인으로 이름났다.
특히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옷자락이 잘린 두루마기 한벌을 유물로 물려받는 가통이 있었다.

어느날 저녁 무렵 화려한 옷차림에 준마를 타고 남소문을 지나는데, 골목 어귀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손짓하며 부르므로 그가 말에서 내려 따라가니 집이 깊숙한곳에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그 여인은 그를 대하자 홀연히 눈물을 흘렸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귓속말로 "공의 풍채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나로 인하여 비명에 죽겠소" 하였다.
무슨 뜻인가를 따져 물으니 미녀는 "도적의  무리가 나를 미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죽이고,
입은 옷과 타고온 말과 안장을 나누어 갖고 살아온지가 해포가  되었습니다.


항상 탈출할 것을 생각해 왔으나 도둑의 일당이 많으므로 두려워 탈출을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나를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는 칼을 빼어 들고서 잠을 자지않고  있었는데, 밤중이 되자 방의 윗쪽 다락으로부터 여인을
부르는 소리가 나면서 큰 밧줄이 내려왔다. 그는 몸을 솟구쳐 벽을 차 무너뜨리고 급히 여자를
업고 몇겹의 담을 뛰어넘어 나와서는 여인이 붙잡는 옷자락을 잘라 버리고  달려 나왔다.
그 이튿날 벼슬을 사직하고 선산(善山)으로 돌아와 무인의 노릇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고,
옷자락이 잘린 옷을 보이면서 항상 손자들에게 경계하였다고 한다. 그는 낙동강변에서 두문불출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고 한다.

 

밀성군 광영의 손자인 낙촌공 충원(忠元)은 명종때 단종의 원령으로 잇따라 7명이 죽어가는
영월 군수를 자청하여 부임해 가기도 했으며 그뒤 중종실록과 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156
선조때 우찬성·이조판서를 역임한 후 지중추부사로 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이 세도가인 윤원형이 사위를 삼고자 청하는데 면전에서 거절한 
계현(啓賢)이며,
계현의 손자가 영의정에 오른
승종(承宗)이다.

 
광해군의 폭정 속에서 영상에 올랐던 승종은 항상 오리알만한 큰비상을 차고다니며

  말하기를 "불행한 시대를 만나 조석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 이물건이 없어서 되겠는가"하며
광해군의 비리적 행동에 진정하지 못하고 흐느끼며, 폭주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날 그는 아들
자흥(自興)을 불러 마음속에 있는바를 써놓고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했다.
 
복야공파
언인(彦仁)의 후손에서는 우리나라 [삼대악성]으로 손꼽히는 연(堧)이 뛰어났다.
삼사좌윤
천석(天錫)의 맏아들로 태어나 태종초에 문과에 급제한 연은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정리와 악보찬집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편경(編磬) 12매를 제작,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케 했고, 조정의 조회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雅樂)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하는 등 궁정 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조선 실학의 태두 제가(齊家)는 19세때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이덕무, 류득공,
이서구 등과 더불어 [시문4대가]로 일컬어졌으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한
북학의(北學議)를 작성하여 기구와 시설의 개편, 불합리한  제도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남한에 총 641,821가구,

2,704,6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오금리

경북 군위군 우보면 모산동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상도리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동, 이서면 일원

     경기도 옹진군 용연면 오산리

경북 문경군 가은읍 수예리

     전남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

충북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

     

밀성대군사실과 주요 인물

 

[밀성본관의 읍호연혁]

추화 밀성 밀산 밀천 밀직 응천 응원 밀원 밀주 밀진 은산 귀화 귀산 죽산 으로 되었다.밀성은 본시 신라때 추화군인데 속현이 다섯으로 상약 밀진 오악 형산 소산 이었다. 경덕왕이 밀성군으로 고쳤더니 고려초기에도 그대로 일컬어 감무를 두었다. 성종때 밀주로 개칭 속리를 두었더니 충열왕 원년에 강등하여 귀화부곡을 삼았다가 후에 밀성현으로 복구하였다. 공양왕조에 증조비 박씨의 부친 익양후의 고향이라 하여 밀양부로 승격시켜 지금까지 그대로 불러왔다. 전조(신라)에 밀성대군께서 이 고을을 봉읍으로 받았으나 연대가 이미 오래되고 문헌의 확실한 증거가 없어 배위 및 묘소를 가히 상고하지 못한다. 옛 말에 영남루 터는 곧 그 유지이며 고을 안에 이궁대,풍류현,세루정이 있는데 신라왕이 거동 하시던 곳이라고 세상에 전한다. 권양촌 이 기술한 당시 유사에 또한 대군의 유적으로 믿을만 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밀성대군사실]

밀성대군 언침은 신라 경명왕(시조의 29세손)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밀성대군에 봉군 되었다.밀성대군부에 있는 이궁대 풍류현 세루정은 신라왕들이 거동하여 놀던 곳이라 한다.이궁대는 본래 신라의 어진 사람들이 백성을 덕화함으로 동경(경주의 옛지명)이 태평성사에 젖었으니 이궁대,풍류현,세루정의 이름이 당시의 풍속과 민요에서 나온 것이다. 대군이 밀성으로 봉군된후 자손이 살은지 천년에 지파가 번연하고 세상에서 이름난 재상과 선비가 많이 탄생하였고 일국에 거족이 되었다.대군이 아우 칠인과 같이 봉군된 사실은 신라사기에 실려서 천년 뒤에도 형제간의 동근의 義가 밝고 깊다.서기 1922년 팔도 성손들이 순의하여 원덕사를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에 세우고 대군의 후예인 모든중조,즉12중조를 배향하였다.그후 4년 뒤 을축에 또 단을 밀양영남루 언덕에 모으고 또 그 후 2년 뒤 정묘년에 제단을 밀양무안리에 모으고 삼한벽공도대장군 휘 욱과 요동독포사 란을 아울러 3대조를 제사하니 이곳을 경덕재만운각유경 이라고한다.즉 지금의 밀성재이다.또 밀성박씨는 전국박씨의 종가이며 밀성 박씨에서도 태사공파(휘 언부)의 주손인 은산부원군(휘 영균)파가 대종손이다.

[12중조사실]

*언부(彦孚)  고려 문종조 최충과 더불어 태사 중서령을 역임하고 문하시중 밀성 부원군에 봉해 졌다.   종파인 은산부원군파,행산부원군파의 중시조 이시다. 출처 동사평림.

*중미(中美)  고려 공민조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밀직부원군으로 분봉되었다. 언부공의 후손이다.

*원(元)  의신(義臣)의 아들이다. 사문진사를 역임하였다.

*척(陟)  고려 충선조 밀성군으로 분봉되었다.시호가 충헌공 이시다.

*현(鉉)  사헌부규정이시며 규정공파의 시조이시다.

*언상(彦祥) 도평의사 밀직부원군이시며 언부의동생이시다. 출처 고려사

*언인(彦仁) 밀직군이시며 언부의 동생이시다.

*양언(良彦) 밀직부사공 이시다.

*원광(元光) 영동정 이시다.

*천익(天翊) 판도판각공 이시다.

*을재(乙材) 삼사좌윤공 이시다.

*위(威)  정국군 이시다.

[ 파별 선조(파조)사실 ]

*태사 문하시중공파 (언부,대군7세손): 은산부원군파(13세손 영균), 행산부원군파(13세손 세균), 좌상공파(12세손 상례), 규정공파(15세손 현), 사문진사공파(9세손 원), 밀성군파(12세 척),반남(대군13세손 응주)로 대파가 포함된다.

*도평의사공파 (7세손 언상)

*좌복야공파 (7세손 언인)

*밀직부사공파 (7세손 양언)

*판도판각공파 (7세손 천익)

*좌윤공파 (7세손 을재)

*영동정공파 (12세손 원광)

*밀직부원군파 (14세손 중미)

*정국공파 (14세손 위)

[고려조 밀성대군파 封君 인물]

밀성부원군 휘 彦孚 태사중서령.밀직군 휘 彦仁 삼중대신 평장사.영암군 휘 通 .밀성군 휘 榮.영암부원군 휘 光.밀성세흥군 휘 元孝.태안군 휘 元議.밀성군 휘 光禮.밀성군 휘 陟.문의군 휘 衍.문의백 휘 行.담원부원군 휘 喜文.은산부원군 휘 永均.밀성부원군 휘 世均.밀성군 휘 天卿.밀성군 휘 興.밀직부원군 휘 中美.밀산군 휘 元.화녕군 휘 해.밀성군 휘 允文.밀산군 휘 密陽.

[고려조 밀성대군파 名賢]

대장군 휘 郁.독포사 휘 瀾.밀성부원군 휘 彦孚.도평의사공 휘 彦祥.밀직군 휘 彦仁.밀직부사 휘 彦良.판도판각 휘 天翊.삼사좌윤 휘 乙材.문익공 孝臣.공부상서 휘 義臣.사문진사 휘 元.소감 휘 允.참판 휘 林.밀성군 陟.양혜공 휘 元光.문헌공 휘 永均.충정공 휘 世均.정승공 휘 華.밀직부원군 中美.규정공 휘 鉉.문경공 휘 宜中.밀산군 휘 允文.전법판서공 휘 思敬.문정공 휘 尙衷.

[고려조 밀성대군파 隱逸 인물]

송은공 휘 翊.도은공 휘 文彬.좌의정공 휘 仁翊.정재공 휘 宜中.처사공 휘 成文.

[조선조 밀성대군파 封君 인물]

정국군 휘 威.밀산군 휘 功文.의천군 휘 藻.밀계군 휘 孝賢.구산군 휘 천.밀산군 휘 仲孫.밀평군 휘 蘭.응원군 휘 安世.운성부원군 휘 從愚.밀산군 휘 居謙.밀원군 휘 忠元.밀흥군 휘 安吉.밀산군 휘 亨孫.밀원부원군 휘 健.밀천군 휘 崇元.밀창부원군 휘 承宗.진원군 휘 熙中.밀성군 휘 光榮.밀산군 휘 春城.밀릉군 휘 孝恒.밀풍군 휘 啓昌.밀림군 휘 珷.

[조선조 밀성대군파 명현]

우당공 휘 融.인당공 휘 昭.아당공 휘 調.졸당공 휘 聰.판서공 휘 臣敬.참의공 휘 臣寵.문헌공 휘 堧.국당공 휘 興生.이요당공 휘 興居.성열공 휘 從愚.돈제공 휘 衍生.오졸재공 휘 漢柱.화은공 휘 繼息.통찬공 휘 文孫.진사공 휘 承孫.소요당공 휘 河淡.나산경수공 휘 剛生.청풍당공 휘 英孫.파청원공 휘 嗣宗.충정공 휘 審問.삼우정공 휘 慶新.제우당공 휘 慶傳.국헌공 휘 慶胤.용연공 휘 慶因.묵재공 휘 宗元.관찰사공 휘 徐昌.용암공 휘 驚.설봉공 휘 燦.우졸재공 휘 乾甲.지족당공 휘 明傅.정무공 휘 好問.삼암공 휘 以謙.비암공 휘 以恒.공효공 휘 仲孫.송강공 휘 恩訥.존성재공 휘 楣.공간공 휘 楗.항재공 휘 0.태암공 휘 惺.국담공 壽春.대사헌공 義榮.밀성군 휘 光榮.눌재공 휘 增榮.우곡공 휘 身潤.문목공 휘 英.돈계공 휘 栗.문도공 휘 薰.문경공 忠元.충정공 휘 崇元.문장공 휘 啓賢.화공 휘 好賢.의곡공 휘 鼎賢.장주공 휘 震元.숙민공 휘 承宗.판서공 휘 仁立.취석당공 휘 榥.초당공 휘 守玄.충장공 휘 榮臣.청절당공 휘 承禧.습천공 휘 光佐.신재공 휘 承俊.용암공 휘 台考.송호공 휘 昌懲.나산공 휘 春英.나곡공 휘 春茂.상옹공 휘 愚.薪촌공 휘 廷英.무숙공 휘 震英.관일당공 휘 文楗.필천공 휘 0敍.

[국승여지 인물 ]

박의신(朴義臣).박육화(朴育和).박영인(朴永寅).박간(朴幹).박세균(朴世均).박인간(朴仁幹).박윤문(朴允文).박익(朴翊).박문빈(朴文彬).박의중(朴宜中).박언충(朴彦忠).박홍신(朴弘信).박융(朴融).박중손(朴仲孫).박미(朴楣).박건(朴楗).박돈지(朴敦之).박열(朴說).박충원(朴忠元)

[영남여지승람 밀주인물]

侍中   朴孝臣 . 尙書   朴義臣 . 尙書   朴育和 .  貳相   朴幹 . 銀山君  朴永均 . 平章事   朴世均 .

御史   朴永寅 . 大提學  朴允文 .糾正  朴鉉 . 密直事   朴仁幹 . 大司成  朴文彬 . 大提學  朴宜中 .

左議政  朴翊 . 贊成   朴臣敬 . 參判   朴臣寵 . 靖國君   朴威 . 參議  朴彦忠 . 監正  朴弘信 .

天郞   朴融 . 獻納  朴漢柱 . 司간  朴光佑 . 贈參議 朴壽春 . 

[밀주지 인물]

밀성군 박언부.시중 박효신.상서 박의신. 상서 박육화. 어사 박영인. 대제학 박윤문. 밀직사 박인간.

대제학 박의중.찬성 박돈지.참찬 박說.대사성 박문빈.좌의정 박익.밀직군 박중미.정국군 박위.

참의 박언충.감정 박홍신.진사 박시거.교리 박시용.증참판 박노.천랑 박융.생원 박소.참찬 박중손

참의 박미.찬성 박건.통찬 박문손.헌납 박한주.승정 박말주.교리 박민준.생원 박열

[국조방목 인물]

박융(태종 술자식년.병과2등).박연(태종 신묘식년.진사).박절문(태종 신묘식년.진사).박서(태종 갑오식년.진사2등).박시생(태종 갑오친시.을과3등).

박유(세종 을유식년.병과).박윤창(세종 을유식년.동진사).박중손(세종 을묘식년.병과).박심문(세종 병진친시.병과).박찬조(세종 정묘초시.병과2등)

박건(단종 계유추시.을과)

박시형(세조 병자식년 을과).박여동(세조 병자식년.정과).박미(세조 술인정시.을과2등).박원충(세조 을묘식년.정과).박영손(세조 경진구월별시.을과2등).박거명(세조 갑신춘시.정과).박견(세조 술자춘장.을과).

박사동(예종 을축추장.을과).

박문효(성종 병신별시.을과).박눌(경자년식.을과).박의영(임인친시.병과).박승륜(계묘춘장.병과).박증영(계묘춘장.병과).박한주(을사별시.갑과).박소영(을사별시.병과).박설(을유식년.을과).

박광영(연산 술오식년.병과)

박형간.박몽우.박훈.박충원.박위.박문수.박호.박충원.박유경.박춘세.박계현.박호원.박인원.박근원.박율.

박민준.박숭원.박영.박승종.박수홍 등 자료수집후 등재합니다.

이상으로 밀성박씨는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261명, 상신 1명, 대제학 2명, 청백리 2명을 배출하였으며 연산군 무오,갑자 양사화로 박문은 초야로 들어가 학문의 연마에 주력하였다.

 

박씨라는 성씨(性氏)에 관하여...

 

박씨 성의 본관은 문헌에 30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시조 또는 중시조가 밝혀진 것은 70본 내외이며 그 중 주요 본관은 밀양(密陽) ·반남(潘南) ·죽산(竹山) ·함양(咸陽) ·순천(順天) ·고령(高靈) ·무안(務安) ·충주(忠州) ·상주(尙州) ·창원(昌原) ·음성(陰城) ·영해(寧海) ·영암(靈巖) ·진원(珍原) ·고성(固城) ·울산(蔚山) ·운봉(雲峰) ·춘천(春川) ·비안(比安) ·강릉(江陵) ·월성(月城) ·태인(泰仁) ·면천(沔川) ·삼척(三陟) ·문의(文義) ·장성(長城) 등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고 하며,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화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 왕실의 56대 세계(世系)는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는데, 그 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婆娑王)과 일성왕(逸聖王) 대(代)에서 갈라졌는데,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 ·면천 ·강릉 등으로 분파 관적(貫籍)했고, 비안 ·우봉(牛峰) ·이산(尼山) ·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라 한다. 한편 일성왕계는 그의 26세손인 경명왕(景明王) ·경애왕(景哀王) 대에서 다시 갈라졌는데,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각기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밀양 ·반남 ·진원박씨 등),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고령박씨),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함양 ·삼척박씨 등),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죽산 ·음성 ·고성박씨),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상주 ·충주박씨),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전주 ·무안박씨),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순천 ·춘천박씨 등),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경주박씨)의 8대군파와, 국상공파(國相公派:울산박씨)로 분파되었다.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박씨를 ‘8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김씨 ·이씨와 함께 한국의 3대성의 하나이며, 1960년 국세조사에 36만 7271가구에 인구 211만 2076명으로 성별 순위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3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81만 5151 가구로 전국 가구 구성비 8.5 %로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3위였다.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씨의 대종이며, 시조는 신라 경명왕의 제1왕자인 밀성대군 언침 (彦)이다. 밀양박씨는 박씨 인구의 70~80 %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 계보도 상당히 복잡하 다. 밀양박씨의 세계는 밀성대군의 8세손인 언부(彦孚: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를 중시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사공파(都評議使司公派) ·좌복 야공파(左僕射公派)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판도공파(版圖公派) ·좌윤공파(左尹公 派) 등으로 대별되고, 각 파는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또 여러 파로 분파된다. 예컨대 가장 규 모가 큰 문하시중공파는 종파인 은산공파(銀山公派:永均) ·행산군파(杏山君派:世均)를 비롯 하여 좌상공파(左相公派:尙禮) ·규정공파(糾正公派:鉉) ·사문진사공파(四門進士公派:元) · 밀성군파(密城君派:陟) 등으로 갈라지고, 이들은 또 여러 파로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규정 공파가 밀양박씨의 분파 중 가장 후손이 번창하다. 또 규정공파에서 나누어진 파 중에서 특 히 낙촌공파(駱村公派:忠元) ·강수문도공파(江文度公派: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밀양박씨 는 조선에서 문과급제자 261명,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2명, 청백리(淸白吏) 2명을 배출하였다. 밀양박씨의 대표적 인물을 열거하면 규정공파에서 강생(剛生) ·심문(審問) · 중손(仲孫) ·건(楗) ·훈 ·충원(忠元) ·계현(啓賢) ·승종(承宗) ·영(英) ·성원(聖源) 등 이 있고, 사문진사공파에서 의중(宜中) ·거겸(居謙) ·종남(宗男)과 영신(榮臣) 부자 ·연 (堧) ·열(說)이 있으며, 밀성군파에서 신규(信圭) ·이서(彛敍) 등이 있다. 상기 인물 중에 서 충원은 명종 때 대제학을 지냈고, 승종은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인조반정 후 자결 하였으며, 열은 중종 때, 신규는 숙종 때의 청백리이다. 이 밖에 밀양박씨의 두드러진 인물 로서 실학(實學)의 대가 제가(齊家)가 있다.

【반남박씨(潘南朴氏)】 시조는 고려 고종 때 반남현의 호장(戶長)을 지낸 응주(應珠)이다. 그의 현손 상충(尙衷)은 전교시판사(典校寺判事)를 역임하고 《사전(祀典)》을 저술하였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15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을 배출하여 박씨 중에서 벼 슬 열력(閱歷)이 가장 화려하다. 대표적인 인물을 열거하면 은() ·숭질(崇質) ·세채(世采) ·종악(宗岳) ·종훈(宗薰) ·회수(晦壽) 등의 상신, 태상(泰尙) ·규수(珪壽) 등의 대제학, 세당(世堂) ·지원(趾源) 등의 뛰어난 학자가 있으며, 소(紹) ·응남(應男) ·응복(應福) · 태보(泰輔) 등의 인물이 있다. 규수는 대제학과 우의정을 역임한 인물이며, 정양(定陽) ·영 효(泳孝) 등과 더불어 개화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반남박씨는 이 밖에도 조선 후기에 판서급 (判書級)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죽산박씨(竹山朴氏)】 8대군파 죽성대군의 정통 후손이며, 시조는 죽성대군의 아들 기오 (奇晤)이다. 그는 고려 초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죽산을 식읍(食邑)으로 하 사받고 죽산에 관적(貫籍)하였다. 죽산박씨의 세계는 철성백파(鐵城伯派) ·찬성공파(贊成公 派) ·태복경파(太僕卿派) ·문광공파(文匡公派)의 4파로 갈라지고, 다시 문광공파에서 죽산 군파(竹山君派) ·문충공파(文忠公派) ·판서파(判書派) ·제학파(提學派) ·충현공파(忠顯公 派) 등 5파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고려 왕조가 철성백파의 후손에게 음성(陰城)과 고성(固 城)을 식읍으로 하사함으로써 음성박씨와 고성박씨가 철성백파에서 분파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39명의 문과 급제자와 2명의 상신을 배출하였다. 죽산박씨의 대표적 인물을 열 거하면 서(犀) ·전지(全之) ·원형(元亨) ·홍구(弘耉) ·명현(名賢) ·명룡(命龍) ·문수 (門壽) ·경신(慶新) 등이다.

【함양박씨(咸陽朴氏)】 8대군파 속함대군의 정통 후손이며, 시조(중시조)는 고려의 예부상 서 선(善)이다. 고려시대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고종 때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 한 공으로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진 신유(臣)의 여섯 아들에서 6파로 갈라졌다. 즉, 군기소 감공파(軍器少監公派) 지문(之文) ·문원공파(文元公派) 지빈(之彬) ·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 公派) 지량(之亮) ·부사공파(副使公派) 지수(之秀) ·어사공파(御史公派) 지온(之溫) ·중랑 장공파(中郞將公派) 지영(之穎)인데, 이 6형제파를 세칭 ‘육지파(六之派)’라고 한다. 이 중 에서 문원공파와 부사공파가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을 열거하면 충좌 (忠佐) ·초(礎) ·습(習) ·대립(大立) ·세영(世榮) ·세무(世茂) ·세옹(世) ·민헌(民獻) ·헌(軒) 등이다. 조선시대에 6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순천박씨(順天朴氏)】 8대군파 강남대군의 후손이며,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영규(英規), 중시조는 대제학 숙정(淑貞)이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35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을 열거하면 중림(仲林), 사육신(死六臣) 중의 하나인 팽년(彭年), 계창(繼昌) ·원 종(元宗) ·이장(而章) ·광일(光一) ·기정(基正) 등이 있다. 팽년의 둘째 자부가 낳은 비 (婢) 소년의 일화는 유명하며, 간신히 이어진 그 일족이 오늘날의 ‘묫골박씨’이다.

【고령박씨(高靈朴氏)】 8대군파 고양대군의 후예로서 섬(暹) ·환(還) ·연(連)을 중시조로 하는 3파가 있다. 3파 중에서도 섬의 사인공파(舍人公派)와 환의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에 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 도합 56명의 문과 급제자, 1명의 상신, 4명의 청백 리를 배출하였다. 사인공파의 대표적 인물은 은(誾) ·장원(長遠) ·문수(文秀), 상신(相臣) 영원(永元) 등이고, 부창정공파의 대표적 인물은 광순(光純) ·광우(光佑) ·우생(雨生) ·임 종(林宗) ·만(蔓) ·처륜(處綸) ·영준(永俊) ·난영(蘭英) ·정번(廷) 등이다.

【무안박씨(務安朴氏)】 8대군파 완산대군의 후예로서 시조(중시조)는 고려 초에 공을 세워 무안을 식읍으로 받은 진승(進昇)이다. 조선시대에 21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대표적 인물은 고려시대의 박승중(朴昇中), 조선시대의 의장(毅長) ·홍장(弘長) ·창하(昌夏) · 호(浩) 등이고, 현대인물로는 한글 점자(點字)의 창안자인 두성(斗星)이 있다.

【충주박씨(忠州朴氏)】 8대군파 사벌대군(沙伐大君)의 후예로서, 시조(중시조)는 고려시대 부정(副正)을 지낸 영(英)이다. 조선시대에 20명의 문과 급제자, 1명의 상신과 대제학, 1명의 청백리를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은 청백리에 오른 상(祥), 대제학과 영의정을 역임한 순 (淳), 그 밖에 우(祐) ·희수(希壽) 등이 있다.

【상주박씨(尙州朴氏)】 8대군파 사벌대군의 정통 후손이며, 시조(중시조)는 고려시대의 덕 천창부사(德泉倉副使) 견(甄)이다. 대표적 인물은 광우(光佑) ·안신(安臣) ·세희(世熹) · 건중(建中) 등이다.

【창원박씨(昌原朴氏)】 의창박씨(義昌朴氏)라고도 한다. 시조는 밀성대군의 12세손이며 고 려의 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 평장사(平章事)인 유화(有華)이다. 손자 정빈(正)은 전객시 판사(典客寺判事), 증손 영(齡)은 공민왕 때 창원도호부사(昌原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음성박씨(陰城朴氏)】 시조는 고려의 공부상서(工部尙書) 자(梓)이다. 죽산박씨의 철성백 파(鐵城伯派)에서 분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손자 순(淳)은 함흥차사(咸興差使) 이야 기의 주인공으로서 고려 말기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종군하였으 며, 조선 개국 후 상장군이 되었다. 그가 태종(太宗)을 미워하여 함흥에 머물고 있는 태조를 설득하고 돌아오다가 용흥강(龍興江)에서 피살되어 다시는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게 됨으로 써 이 말이 유명해졌다. 역사적 인물로는 광옥(光玉)이 있다.

【영해박씨(寧海朴氏)】 시조는 신라 갈문왕(葛文王) 아도(阿道)의 손자이며 눌지왕(訥祗王) 때의 충신인 제상(堤上)이고, 중시조는 고려의 전법사판서(典法司判書)인 천명(天命)이다. 대표적 인물은 경(經) ·원계(元桂) ·자청(子靑) 등이다.

【영암박씨(靈岩朴氏)】 시조는 고려 인종 때의 좌정승 항(恒)이다. 평장사(平章事) 언인(彦 仁)의 손자이고, 시중(侍中)을 지낸 찬행(讚行)의 증손이며, 그의 아들 통(通)은 영암군(靈岩 君)이고, 손자 광(光)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증손 성제(成濟)는 장군, 7세손 성찬(成贊)은 좌 찬성(左贊成), 9세손 징(澄)은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진원박씨(珍原朴氏)】 구진박씨(丘珍朴氏)라고도 한다. 시조는 고려의 대장군 진문(進文) 이다. 그의 현손 첨(瞻)은 고려 때 시중(侍中)이며, 첨의 증손 희중(熙中)은 예문관직제학 · 남원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명필로 이름났다.

【고성박씨(固城朴氏)】 시조는 죽산대군의 13세손이며 고려의 문하시중을 지낸 빈(彬)이다. 그의 손자 보로(普老)는 고려 우왕(禑王) 때 수차에 걸쳐 왜구를 격퇴하고 문하평리(門下評 理)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를 역임하였다.

【울산박씨(蔚山朴氏)】 시조는 고려 예종 때의 대장군 익찬공신(翊贊功臣) 윤웅(允雄)이다. 신라 경명왕의 제9자 교순(交舜)의 6세손이다. 그의 후손 율()은 조선 효종 때 문과에 급제, 장령(掌令)을지내고, 아들 규세(奎世) ·두세(斗世) 형제는 숙종 때 문과에 함께 급제하여 형은 군수, 아우는 목사를 거쳐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 이르렀다.

【운봉박씨(雲峰朴氏)】 시조는 고려 말의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중화(仲華)이다. 그 의 증손 신(信)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조선시대에 찬성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 다. 신의 아들 종우(從愚)는 태종의 부마가 되었고, 세조를 도와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춘천박씨(春川朴氏)】 시조는 강남대군의 10세손이며, 고려 충렬왕 때의 찬성사 좌명공신 (佐命功臣)인 항(恒)이다. 그는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으며, 문 장이 뛰어나고 매사에 공명정대하였다. 그의 아들 원굉(元宏)은 평장사, 원비(元庇)는 판서 를 지냈고, 원굉의 아들 안구(安具)는 대제학, 증손 의공(義公)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원비 의 아들 광선(光先) ·여(旅) 부자는 다같이 직강(直講)을 지냈다.

【비안박씨(比安朴氏)】 시조는 고려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우(瑀)이다. 그의 아들 일(逸)은 판도사판서(版圖司判書), 증손 징(徵)은 공조전서(工曹典書), 5세손 계오(繼五)는 판도사판서 를 지내고, 계오의 증손 서생(瑞生)은 대사헌 ·집현전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또한 그는 수차(水車)의 사용을 건의하여 농사에 혁신을 가져왔다. 서생의 아들 효 원(孝元)은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찬하고 장령(掌令)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강릉박씨(江陵朴氏)】 시조는 신라 파사왕(婆娑王)의 31세손인 순(純)이다. 그는 고려 명 종 때 문과에 급제, 병부상서 겸 대장군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되고 좌복야(左僕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다. 그의 후손 수량(遂良)은 유일(遺逸)로 천 거되어 용궁현감(龍宮縣監)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월성박씨(月城朴氏)】 8대군파 월성대군의 정통 후손이며 시조는 인육(仁育)이다. 그의 후 손 홍미(弘美)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표리 (表裏)를 하사받고 경주부군(慶州府君)에 봉해졌다. 제인(齊仁)은 선조 때 태릉참봉(泰陵參 奉) ·왕자사부(王子師傅)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태인박씨(泰仁朴氏)】 시조는 고려 문종 때의 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司使) 언상(彦祥)이 다. 중시조는 그의 후손 현손(賢孫)이고, 현손의 증손 수량(守良)은 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 제, 좌찬성(左贊成)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면천박씨(沔川朴氏)】 시조는 고려의 삼중대광(三重大匡) 대승(大丞) 득의(得宜)이다. 그의 아들 술희(述希)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936년(태조 19) 후백제를 칠 때 큰 공을 세웠으며, 왕이 죽을 때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다. 중시조는 계(桂)이며, 그의 증손 인호(仁護)는 대장군, 6세손 대부(大富)는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냈 다.

【삼척박씨(三陟朴氏)】 시조는 속함대군의 후손이며 고려 공민왕 때의 좌복야(左僕射)인 원경(元慶)이다. 그의 아들 준제(準提)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증손 방실(邦實)은 군수, 후손 현좌(賢佐)는 국자감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문의박씨(文義朴氏)】 시조는 고려의 명신 의중(宜中)이다. 그는 1258년(고려 고종 45) 최 의(崔)를 죽이고 국권을 왕에게 돌린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었다. 그의 손자 영(寧)은 고려 말 공조전서(工曹典書)로 두문동(杜門洞) 72현(賢)에 들었다. 영의 5세손 계운 (啓運)은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이며 효자로 이름났다.

【장성박씨(長城朴氏)】 시조는 밀성대군의 8세손인 효신(孝臣)의 둘째 아들 공발(公發)이 다. 그는 고려 인종 때 대장군으로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이성부원군(伊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6세손 세영(世英)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역 임하고 홍건적(紅巾賊)과 탐라(耽羅)의 난을 평정하여 좌명정국공신으로 장성군(長城君)에 봉해졌으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서 충절을 지켰다. 조선 성종 때 홍중(洪中)이 이조좌랑 을 지내고, 그의 아들 덕원(德源)은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싸움에서 7백의병의 한 사람으 로 순사하였다.

 

諡號 (시호)

시호란 왕 또는 종친(宗親), 정2품 이상의 문무관(후에는 정2품 이하에까지 확대),

국가에 특별히 공이 많은 신하들, 또는 학문이 뛰어나 존경을 받은 유학자에게 그들이

죽은 뒤, 생전의 행적을 칭송하여 국가에서 추증(追贈)하는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중국에서부터 시행된 듯 하여 요(堯)·순(舜)·우(禹)등도

시호로 해석된다.  

그러나 시법의 제도가 정해진 것은 주나라 때인 듯 하며, 후에 진시황의 명에 따라

일시 폐지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514년(신라법흥왕1)왕이 죽자, 지증왕이라는 시호를 준 것이 시초가

되며 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절차는,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자손들이 모여서 선조의 행실과 공적 등을

의논하여 예조에 제출하면, 예조에서는 봉상시(국가의 제사나 시호에 관한 사무를 맡

아 보던 조선의 관청)를 거쳐 홍문관에 보내어, 봉상시정과 홍문관의 응교(정4품)이사

이 한자리에 모여 결정한다.  

한편, 임금의 특별한 교시가 있을 때는 자손들의 신청을 기다리지 않고 홍문관과 봉상

시에서 직접 시호를 저어했는데, 이는 퇴계 이황에게 [문순(文純)]이란 시호를 내려준

데서 비롯됐다.  

시호를 정하는 법으로는 [주공시법(周公諡法)]·[춘추시법(春秋諡法)]에 따랐으며, 시

호에 사용된 글자는 120여자에 달했다.

이는 글자마다 뜻이 들어 있어 생전의 행적에 알맞는 글자를 조합(組合)하여 만들고,

시호 아래 [공(公)]자를 붙여 부른다.  

숭문주의사회에서는 문(文)자가 최고의 영예였으며, 이외에도 정(貞)·공(恭)·양(襄)·정

(貞)과 무관에게는 충(忠)·무(武)·의(義)등의 자랑스러운 글자였다.  

시호를 받는다는 것은 가장 영예로운 표창으로 족보에는 물론, 묘비(墓碑)에도 기입되

는데 그 중요성 때문에 글자문제로 시비와 논란이 많았으며, 뒷날에는 개시를 요구하

는 일도 많았다.  

한편 김굉필(문경공)·정여창(문헌공)·서경덕(문강공)·조광조(문정공)·김장생(문원공)

등은 정2품의 벼슬이 못되었어도 시호를 추증 받았다.  

무인의 시호로 가장 영예스러운 충무공은 이순신장군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지

만, 남이 ·김시민등 8명이나 있다.  

또한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시호를 못 받은 임금들이다.

 

功臣 (공신)

공신이란 국가나 왕실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주던 칭호이며,이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서 신라시대에 이미 녹공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때에는 왕건이 개국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3등급으로 구분하여 각각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상을 내렸으며, 공신당(功臣堂-공신각)을 두어 1등 및 2등 공신의 화상을 벽에다 그려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라 일컬었고, 훈전(勳田)을 내려 대대로 그 자손을 관직에 등용하였다. 이러한 공신들에게 초기에는 녹권(錄券)을 주어 공신증명으로 하였으나, 말기의 중흥대신에게는 녹권이외에 따로 교서를 주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태조(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공신에 녹훈(錄勳)된 개국공신 및 정사·좌명공신을 비롯한 28종에 이르는 공신이 있었다. 이러한 공신들에게는 공을 세운 정도에 딸 등급을 나누어, 영작(영예스러운 작위)·토지·노비·금 등을 지급하고 자손들에게는 음직(蔭職)을 주었다. 공신에 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으로는 공신도감(功臣都鑑)·충훈부(忠勳府) 또는 공신 상훈교서(功臣常勳敎書)라 칭한다. 녹권은 공신축(功臣軸) 또는 철권(鐵券)과 별칭하여 공신전체의 공적과 상전을 기록한 공신도감이 발급되며, 교서는 수사자 개인의 공적과 상훈을 기록한 개별문서이다.

 

 

개국공신(開國功臣)

1392년 (태조원년) 태조가 송경의 수창궁에서 즉위하면서 조선 개국에 공이 많은 신하들에게 3등급으로 공신을 책록 함.

 

정사공신(定社功臣)

1398(정종 즉위년) 정도전, 남은, 유만수 등 이위 세자를 하려다가 주살 되고 난 후,
그에 대한 공에 큰 신하들에게 2등급으로 공신을 책록함.

 

좌명공신(佐命功臣)

1400(태종원년)회안대군의 난을 평정시킨 신하들에게 4등급으로 공신을 책록.

 

정난공신(靖難功臣)

1453(단종원년)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및 안평대군등을 주살하여 세종의 총신을 제거한 공으로 책록됨.

 

좌익공신(左翼功臣)

1454(세조원년)정인지, 한명회, 권남 등이 단종을 폐하고, 세조를 추대시킨 공으로 책록됨.

 

적개공신(敵愾功臣)

1467(세조13)길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공신을 책록함.

 

익대공신 (翊戴功臣)

1468 예종 즉위년 남이, 강순 등이 반역을 음모한다 하여 이들을 처단하는데 공을 세운,

신숙주, 한명회 등에게 내린 훈명

 

좌리공신(佐理功臣)

1469(성종2) 신숙주, 한명회 등의 신하들에게 임금을 잘 보좌하고 정치를 잘하였다는 공으로 내린 훈명  

 

정국공신(靖國功臣)

1506(중종원년) 박원종, 성희안 등이 연산군을 폐출하고,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중종반정을 이룬 공으로 책록됨

 

정난공신(定難功臣)

1507(중종2) 이과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책록함

 

위사공신(衛社功臣)

1546(명종 즉위년)을사사화를 일으키고 윤임등 대윤파를 몰아낸 공으로 내린 훈명

 

광국공신(光國功臣)

1590(선조23) 종계변무 즉 명나라 역사에 이씨 세계가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친 공으로 내렸던 훈명.

 

평난공신(平難功臣)

1589(선조22)정여립의 모반기미를 박충간이 알아채고 상소하여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책록함.

 

호성공신(扈聖功臣)

1592(선조25)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책록

 

선무공신(宣武功臣)

1592(선조25)임진왜란때 문무제신이 나라의 중흥을 협찬한 공으로 책록

 

청난공신(淸難功臣)

1596(선조29) 이몽학이 일으킨 반란을 홍가신이 평정한 공으로 책록

 

정사공신(靖社功臣)

1623(인조원년) 김류, 이귀 등이 광해군을 폐출하고, 능양군을 옹립하여 인조반정을 결행한 공으로 책록

 

위성공신(衛聖功臣)

1613(광해군5)병자호란 중에 광해군을 수종한 공으로 책록

 

익사공신(翼社功臣)

1613(광해군5) 이이첨, 정인홍 등이 모해하여 임해군, 영창대군, 김제남 등을 살해한 공으로 내린 훈명

 

정운공신(定運功臣)

1613(광해군5)대북파가소북파의 세력을 없애려고 일으킨 옥사로, 김직재 등을 모반혐의로 처형시킨 공으로 책록됨

 

형난공신(亨難功臣)

1613(광해군5 대북파가 소북파의 세력을 없애려고 일으킨 옥사로, 김직재 등을 모반혐의로 처형시킨 공으로 책록됨

 

진무공신(振武功臣)

1624(인조2) 이팔이 일으킨 난을 반란한 공으로 책록.

 

소무공신(昭武功臣)

1627(인조5)이인거가 일으킨 난을 적발한 공으로 책록

 

영사공신(寧社功臣)

1628(인조6)유효립, 정심 등을 죽이는데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책록

 

영국공신(寧國功臣)

1645(인조22)심기원의 역모사건을 평정한 공으로 내린 훈명.

 

부사공신(扶社功臣)

1723(경종3)임인의 옥사을 일으키며 노론을 제거한 공으로 내린 훈명.

 

분무공신(奮武功臣)

1728(영조4)이인좌, 정희량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오명항 등에게 내린 훈명.

 

 

 

족보의 의의

족보란 성씨와 관련하여 한 집안의 혈연관계를 규정하는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은 족보를 집안의 가보로 여겨왔으며, 족보를 대하는 마음은 정한수를 떠놓고 자식의 안녕을 비는 어머니의 마음 이상으로 소중하게 여겨왔다. 이같은 족보가 오늘날 핵가족화 되어 가면서 친족에 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고, 심지어는 젊은 세대의 경우 자신의 뿌리는 커녕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경우는 함자도 모르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족보는 여전히 귀한 우리 민족 대다수의 역사이며, 남북의 통일을 언젠가는 실현시켜야 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까닭인 것이기에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이어가야 할 것이다.

족보의 가치

    족보(族譜)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씨와  관련하여 떼어 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로서,

    조상의 얼과  역사가 담겨있어 가문의 뿌리를 알 수 있는 작은 역사책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유교적 가족주의가 지배했던 조선왕조 시대에는 조상의 계보(系譜) 및 관력(官曆)이 없으면 사회적으로

    행세를 할 수 없음은 물론 벼슬길과  혼사길 조차 막힐 수 밖에 없었으니...족보의 가치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엄청난 가치를 지녔음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서양에서도 귀족사회에서는 가문을 중요시 여겼고 그 바탕은 역시 족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과거 조상들의 족보에 대한 가치관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여야 할 것이다.

     

    새로운 족보관

     

    사람이 자신의 뿌리와 조상의 역사를 알고져 하는 것은 본능적인 인간의 지적욕구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주위환경속에서 자칫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버리고 살아 갈 수가 있다.

    족보는 어쩌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도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여도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며 평범한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작은 수단이 족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종교와 이념 사상을 떠나서 족보는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보며, 이러한 바탕

    속에서 점점 더 황폐해져 가는 우리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조상의 역사를 알고  그에  대한 기록을 유지함은 물론 후대를 위하여 가승(家乘)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족보를 통하여 동족끼리 서로 알고 지냄은 물론 조상들의 업적을 본받고 이어 나가야 할 것이다.

     

    족보의 현대적 의의

     

    봉건주의 사회에서는 족보가 양반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족보는 기득권 유지수단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없으며,

    족보를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하는 국민도 없습니다.

    한편으로 세계에 유래없는 족보는 가족사의 자료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봉건사회를 벗어난 현대사회에서 족보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족보는 조상에 대한 관심과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며,

    한편으로 먼 훗날의 자신의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으로 남기위한 규범역할을 합니다.

    이와 같이 족보의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살려 족보를 만들어 간다면

    족보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훌륭한 유산으로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댓글 1개:

  1. trackback from: CR7Ronaldo의 생각
    밀양박씨 유래 밀양 박씨 (密陽朴氏)  밀양박씨(규정공파) 홈으로    1> 시조 :  박언침[朴彦枕]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밀양(密陽)은 경남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  법흥왕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이 되었다가 757년 밀성군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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