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14일 목요일

밀양박의 유래




 

▣ 밀양 박씨(密陽朴氏) 기원과 나라를 빛낸 조상들 ▣



밀성(密城) 또는 밀양(密城)은 지금의 경상남도(慶尙南道) 북동부(北東部) 에 위치한 밀양시(密陽市)를 지명(地名)하는 곳으로서 원래, 삼한시대 (三 韓時代)에 변진(弁辰) 24개국 중“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라는 작은 부족국가(部族國家)로 추정되고 변한(弁韓)의 땅으로 가락국(駕洛國)에 속 하였으나 신라(新羅) 지증왕(智證王) 6년(505년) 때, 미리미동국(彌離彌凍 國)을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경덕왕(景德王) 16년(757년)에 전국을 9주(州)로 나누고 군현의 명칭(名稱)을 고칠 때,“ 밀성군(密城郡)”이라 하고 밀주(密州)의 관내에 소속시키면서 5개의 속현(屬縣)을 두었다.

고려시대(高麗時代) 성종(成宗) 14년(995년)에 전국을 4 도호부(都護府) 10 도(都)로 구분할 때, 경주(慶州)와 함께 영동도(嶺東道)에 속 했으며, 밀성군(密城郡)의 격을 높여“밀주군(密州郡)”으로 개칭(改稱)하였다. 그리고 2군(郡)(창녕군, 청도군)과 4현(縣)(현풍현, 계성현, 영산현, 풍각 현)을 관하에 두었다. 현종(玄宗)9년(1018년)에는 "밀성군사(密城郡司)"로 지칭(指稱)하다가 충렬왕(忠烈王)원년(1275년), 조천(趙阡)의 반란(反亂)으로 계림부(鷄林府)에 속하다가 이후에“밀성현(密城縣)”으로 되어있다 충렬왕(忠烈王)11년(1285년)“밀성군(密城郡)”으로 되었다. 이후 공양왕 (恭讓王) 2년(1390년) 밀양부(密陽府)로 승격시켜 조선(朝鮮) 태종(太宗) 원년(1401년)“밀성군(密城郡)”으로 되었다가 15년(1415년) 주민의 호 수를 기준하여 천호 이상의 고을을 모두 도호부(都護府)로 만들게 되었는데 이 때,“밀양 도호부(密陽都護府)”로 되었다. 고종(高宗) 32년(1895년) 칙령 제98호에 의거 23부제 실시로 소지역주의를 채택함에 따라 도(都) 이 하의 부 · 목 · 군 · 현의 제도가 폐지되고 전국이 36군으로 개편할 때 에 “대구부(大邱府)밀양군(密城郡)(시지역(市地域)은 부내, 면(面))”으로 되었다.

고종(高宗) 33년(1896년) 칙령 제36호로 경상남도(慶尙南道) 밀양군(密 城郡)으로 개칭(改稱)된 이후,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로 밀양읍 (密陽邑)이 밀양시(密陽市)로 승격하였다.


밀양 박씨(密陽朴氏) 조상의 최초(最初) 기원(紀元)은 신라(新羅) 시조왕 (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박씨(朴氏)에 비조(鼻祖)로 모시고 지내 오다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 재위 기간 : 917∼924년)의 8대군(大君) 있어는데 이 중 첫째, 아들인 박 언침 (朴彦忱)이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封) 해짐에 따라 본관(本貫)을 밀성 (密城 : 현재의 밀양(密陽)으로 정하여 밀양 박씨(密陽朴氏) 시조(始祖)로 세계(世系)를 이어 내려오다가 언침(彦忱)의 8세손 되시는 언부[(彦孚 :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짐.)]를 중시 조(中始祖)한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가 된다. 이외, 도평의사공파(都 評議事公派 : 8세손 언상(彦祥)·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 8세손 언인(彦 仁)·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 8세손 양언(良彦)·판도공파(版圖公派 : 8세손 천익(天翊)·좌윤공파(左尹公派 : 8세손 을재(乙材)·진사공파(進士 公派 : 10세손 원(元)·밀성군파(密城郡派 : 13세손 척(陟)·동정공파(同 正公派 : 13세손 원광(元光)·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 : 15세손 중미 (中美)·정국공파(靖國公派: 15세손 위(威)·규정공파(糾正公派 : 16세손 현 (鉉)로 12파조(派祖)의 중시조(中始祖)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오면 서 현재까지 계속 여러 파로 나누어져 있으며 지금, 우리나라 단일본관(單 一 本貫)으로서는 최대의 씨족(氏族)임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언침(彦忱) 의 10세손 환(桓)이 영암박씨(靈岩朴氏)로 분적(分籍)하는 등 10여개 본관 으로 다시, 분파(分派)되었다. 밀양 박씨는 여러 박씨(朴氏) 문중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많은 후손들이다.


밀양 박씨(密陽朴氏)의 중요 인물들을 살펴보면, 그 중에서도 특히 고려조 (高麗朝) 이부상서(吏部尙書) 대화(大和)의 손자(孫子)인 영균[(永均 :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은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와 3재상(三宰相 : 현재의 부총리)을 역임하였고 응천군(凝川君)에 봉(封)해졌 다가 뒤에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이후부터 13개파  가 또다시 분파로 형성되어 갔다.

종파(宗派), 8세손 언부(彦孚)가 고려(高麗) 문종조(文宗朝)에 문과(文科) 에 급제하여 권 신(權臣) 최 충(崔沖)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내고 문하시 중(門下侍中)과 도평의사(都評議事)를 거쳐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 졌고 밀성부원군 언부(彦孚)의 차남 의신(義臣 : 고려 인종(仁宗) 때, 공부 상서(工部尙書) 역임)의 아들 사문진사(四門進士) (元 : 의신의 맏아들) 이 있고 후손에 의흥위(義興衛)로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던 척(陟 : 의신 (義臣)의 현손)도 있다.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영균(永均)의 아들 박 익(朴翊) 또는 천 익(天翊), 자(字)는 태시(太始), 호(號)는 송은(松隱)으로 1332년에 태어나 고려조 (高麗朝) 공민왕(恭愍王) 2년(1352년) 이색(李穡), 박상충(朴尙衷)과 함께  문과에 급제해 소감(少監), 예부시랑(禮部侍郞), 세자이부중서령 (世子貳傅 中書令)을 역임하고 한림문학(翰林文學)이 되었다.

고려(高麗)말엽, 구은(九隱) 중 한 분으로서 운명하신 이후, 이씨조선(李氏朝鮮)조정(朝廷)에서『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 으로 증직(贈職)받았다. 조선 정종(定宗) 원년(1399년)정종께서 사시(賜諡 : 임금 은덕으로 내리는 시호)를 충숙공(忠肅公)으로 하사(下賜) 하였다.

원(元)의 8세손 의중(宜中)은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우왕(禑王)때, 대사성(大司成)과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친 뒤에 공신(功 臣)에 올랐으며, 조선이 개국(開國)하자, 조 준(照 準)·정 도전(鄭道傳) 등 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했고 목은(牧隱) 이 색(李 穡)의 문인 (門人)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우아한 문장(文章)으로 문치(文治) 에 고명(高名)하였다.


문종(文宗)때,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재직 중 야인(野 人) 토벌에 전공을 세웠던 거겸(居兼)은 의중(宜中)의 손자이며 증판서(贈 判書)인 경빈(景斌) 의 아들로 성종(成宗)때, 좌리사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밀산군(密山君) 에 봉(封)해졌다.


고려 충목왕(忠穆王)때 문과에 급제한 중미(中美 : 의신 (義臣)의 7세손)는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보리공신(輔理功臣)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밀직 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인 생원(生員) 사눌(思訥)의 아들 성(惺)이 한강(寒岡) 정 구(鄭逑)에게 글을 배우고 선조(宣祖) 때, 김 성일(金誠一)의 참모로 들어가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체찰사(體察使)  이 원익(李元翼)의 막료로 종군(從軍),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 (大長) 으로 활약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했으며 후에 공조좌랑(工曹佐郞)과 안양현감(安陽縣監)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상주(尙州) 싸움에서 순절한 호(호)는 조선 시대 17 세, 최연소자로 선조17년(1584 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 장원급제(壯元 及第) 했다.

그의 아들 종남(宗男)은 선조(宣祖) 때, 상주(尙州)와 광주(廣州)의 목사 (牧使)를 거쳐 회령부사(會寧府使)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영신(榮臣)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는 광해군(光海君)의 뜻을 반대하다가 북관위원(北關渭原 : 옛날, 함경도 현재, 평안북도 위원군 에 있는 면. 압록강 중류의 굴곡 지대에 있으며 목재의 집산지인 군청 소재 지.)으로 유배되었으나 계속 반란을 일으킬 징조가 포착되어 다시, 진도(晋 島)로 이배(移配)시켰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경원부사(慶源府使)를 거쳐 풍천부사(豊川府使) 로 있을 때, 이 괄(李适)의 난(亂)을 평정하다, 이 괄(李适)의 포로가 되었 는데, 그는 힘이 장사이고 용맹함이 널리 알려져 있기에 자기 수하로 포섭하여서나 영신(榮臣)은 자기에 뜻을 굽히지 않고 달려드니, 적장(賊將) 이수백(李守白)이 기절(氣節)에 감동하여 죽이기에는 아깝다고 여겨서나 후환(後患)이 두려워서 참살(斬殺)을 시키자, 피를 토하 면서까지 욕설을 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정종(定宗)의 부마(駙馬)로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오른 부마공(駙 馬公) 갱 [정종(定宗)의 옹주 8녀 중 장녀 함양옹주(咸陽翁主)의 남편]의 7세손 정원(鼎元)이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역임했고,

그의 종손(宗孫) 신규(信圭)는 호조 판서(戶曺判書)를 지낸, 후 청백리(淸 白吏)하였고 글씨 또한, 녹선(綠鱔)같이 아름다워 크게 이름을 떨쳤다.


목사(牧使) 율(栗 : 척(陟)의 11세손)의 아들인 이서(彛敍)는 선조(宣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주서 (注書)로 사관(史官)을 겸직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병조 좌랑(兵曹 佐郞)이 되어 분조(分朝)를 배호(陪扈  : 임금이나 높은 사람을 모시고 따라가는 일)하는데 공헌함이 많아 순찰사종사관(巡察使從事官)으로 황해도 (黃海道) 지방의 병량(兵糧)을 담당했다.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 論)이 대두되자, 광해군(光海君) 15년(1623년) 능양군(綾陽君) 즉, 인조 (仁祖)를 왕으로  김류(金김자점(金自點)·이귀(李貴)·이괄(李适) 등, 서인(西人)의 반정(反正)으로 광해군(光海君)과 집권세력 대북파를 몰아내 고 왕위에 올랐다. 이 때, 여러 차례 대북파를 탄핵(彈劾)했던 그는 무고(誣 告)를 받아 삭직(削職)되었다가 영광군수(靈光郡守)로 복직되어다가 전라도 관찰사 이창준(李昌俊)의 탐학(貪虐) 행위를 개탄(慨嘆)하여 사직했다. 그의 아들 노(籚)는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순검사(巡檢使) 종사관(從事官 : 종 6품)으로 왕(王)을 강화(江華)에 호종(護從 : 보호하며 따라감.)한 공으 로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랐고, 인조(仁祖) 때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사신(使臣)으로 적진에 세 번에 걸쳐 들어가 조약을 어기고 불침 입한 것을 공박하다가 40일간 잡혀 있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을 역임 했던 현(鉉)은 평장사(平章事) 효신(孝臣)의 8세손으로 조선 개국과 더불어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 : 조선시대, 홍문관의 정삼품 당상관 벼슬)에 등용되어 수원부사(水原副使)를 거쳐 안변부사(安邊副使)로 나가서 임지(任 地 : 근무지)에서 생을 마쳤다. 특히, 그는 성리학(性理學)에도 밝은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청백리(淸白吏)로 세간(世間)의 칭송(稱頌)을 받았으며, 후 대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규정공(糾正公) 현(鉉)의 손자 사경(思敬 : 좌랑(佐郞) 문유(文有)의 아들)은 고려조(高麗朝)에서 전법판서(典法判書) 겸 상장군(上將軍)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推城翊威功臣)에 책록 되었으며,

그의 아들 침(沈)·이 공민왕(恭愍王) 때, 전의판사(典儀判事)를 역임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72현(賢)과 함께 밀양 송악산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침(沈)의 둘째, 아들 강생(剛生)은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문과에 급제하 여 의정부사(議政府事)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이후 호조전서(戶曹典 書)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取)하고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태종(太宗) 때, 등용되어 수원부사로 재직 중 과천현감(果川縣監) 윤돈(尹惇)의 전별연(餞 別宴)에서 금천현감(衿川縣監) 김 문(金汶)이 과음으로 죽자, 사헌부(司憲府)의 탄핵(彈劾)을 받았다. 그 후, 세종(世宗)때, 안변부사(安邊

副使)로 다시 등용되어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아들 심 문(審問)은 세종(世宗) 때, 김종서(金宗瑞)가 육진(六鎭)을 개척할 당시, 종사관(從事官)으로 야인에 대한 안무책(安撫策)을 건의했고 계유정난(癸 酉靖難)으로 김종서(金宗瑞)가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사육신(死六臣 : 조선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世祖)]이 단종(端宗)을 축출(逐出) 하고 왕(王)위에 오르면서 절개(節槪)있는 신하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 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을 중심으로 화(禍)를 입힌 사건)들과 더불어, 단종(端宗) 복위에 깊숙이 가담 하고 있던 중 세조(世祖) 2년(1456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義州)에 이르러 사육신(死六臣)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자결을 했다.


생(剛生)의 손자로 세조(世祖) 때, 정난이등공신(靖難二等攻臣)에 책록 되어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진 중손(仲孫 : 좌찬성(左贊成) 절문(切問)의 둘째 아들)은 대사헌(大司憲)과 공조(工曹)를 비롯한 사조(辭朝) 판서(判 書)를 거쳐 밀산군(密山君)에 개봉(改封)되었으며,

그의 맏아들 남(枏)은 부사(府使)를 지냈고, 차남 미(楣)는 대사간(大司諫 : 조선 시대에 임금의 정사를 간(諫)하는 일을 하는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3품)과 예조(禮曹)에 참의(參議 : 조선 시대, 육조(六曹)에 정3품 벼슬)를 거쳐 여지승람(輿地勝籃)을 편찬하였고 시문(詩文)에 덕망이 높아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막내 건(楗)은 세조(世祖) 때,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으로 5대의 왕조 (王朝)를 거치면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에 책록되어 밀산부원군(密山府院君)에 진 봉(進奉)되었다.


찬성공(贊成公) 신생(信生 : 규정공(糾正公) 현(鉉)의 현손, 전서공(典書公) 침(忱)의 막내 아들)의 현손 영(英 : 이조(吏曹) 참판(參判) 수종(壽宗)의 아들)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외손자로 주역(周易)·천문·지리·의술 등 에 능통했으며, 무예(武藝)에 뛰어나 용맹을 떨침으로서 중세의 명인(名人) 으로 이름났다. 특히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옷자락이 잘린 두루마기 한 벌 을 유물로 물려받는 가통(家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저녁 무렵, 화려한 옷차림에 준마를 타고 남소문(南小門)을 지나

골목 어귀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손짓하며 부르기에 말(馬)에서 내려 따라 가보니 집은 산 속 깊숙한 곳에 있었고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그 여인은 집에 도착하여 홀연히 눈물을 흘렸다.

그 까닭을 물어보자, 귓속말로 "공의 풍채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나로 인하여 비명에 죽을 것 같소" 하였다. 도대체 무슨 뜻이 있는가? 따져 물어 보니 여인이 말하길 "도적의 무리가 나를 미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죽이고 입은 옷과 타고 온 말과 안장을 나누어 갖고 살아온 지가 해포가 되었습니 다. 내가 매일 이 곳에서 탈출할 것을 생각해 왔으나 도둑의 일당이 많으므 로 잡혀서 죽을까, 두려워 탈출을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나를 살릴 수가 있 겠습니까?" 하였다. 늦은 밤이 되자, 방 위쪽 다락에서 여인을 부르는 소리 가 들리더니 큰 밧줄이 내려왔다. 박 영(朴英)은 몸을 솟구쳐 다락 벽을 차 사내를 무너뜨리고 급히 여자를 업고 몇 번에 담을 뛰어 넘어서는 여인을 구출해 주었다. 이 때 두루마기를 붙잡고 같이 있기를 원하자, 박 영(朴英) 은 옷자락을 잘라 버리고 도망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박 영(朴英)은 체통이 말이 아님을 느끼고 벼슬을 사직 하고 선산(善山)으로 돌아와서 무인(武人)의 행실을 버리고 오로지, 학문 수련에만 전력 다하며 항상 손자들에게는 잘린 두루마기 옷자락을 보여주 면서 여자들을 경계시켰다고 한다. 이후에 낙동강 강변에서 두문불출(杜門 不出)하고 아래와 같은 시(詩)로 마음을 쓸어 내렸다.

【 멀고 먼 남쪽 변방 바다, 해는 기울어 어두워져도 / 투구 쓰고 갑옷 입 고 넓은 바다 지키는 나는 늙은 왕손 일세. / 기린각 위에 이름 남길 생각, 전혀 없으니 / 낙동강 언덕 마을 속에 내 집 만은 그립구나.】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인근에 학자들이 모두 송당 선생(松堂先生)이라, 일컬어 스승 으로 섬겼다고 하며 의서(醫書)로는 경험방(經驗方)과 활인신방(活人新方) 을 저술했다.


존성재(存誠齋) 미(楣)의 아들 6형제 중에서 연산군(燕山君) 때, 대사간(大 司諫)으로 문의(文義)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던 의영(義榮)과 폐비 윤씨 (尹氏 : 연산군(燕山君)의 생모)의 추숭(追崇)을 반대하다가 목천(木川)에 유배당한 광영(光榮 : 중종(中宗) 때, 형조(刑曹) 참판(參判)을 역임), 성종(成宗) 때, 호당(湖堂)에 뽑히고 교리(校理)를 지낸 증영(增榮), 황해도감사 (黃海道監司)를 지냈고

부제학(副提學)에 올랐던 소영(召榮), 승지(承旨)를 지낸 안영(安榮) 등도 유명하다.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증영(增榮)의 아들 훈(薰)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신진사류로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성주(星州)로 유배되었다가 의주 에 이배(移配)되어, 15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밀성군(密城君) 광영(光榮)의 손자인 낙촌공(駱村公) 충원(忠元 : 별좌(別 坐) 조(藻)의 아들)은 명종(明宗) 때, 단종(端宗)의 원령(怨靈)으로 잇따라 7명이 죽어가는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자청(自請)해서 부임하여 제물(祭物) 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며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사랑하는 왕실(王室)의 맏이보고 / 갑자기 임금의 자리를 내어 놓아라 생고집부리니 너무나도 기가 꽉 막혀 한숨만 나오네 / 지금의 나의 힘은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넋 뿐, / 인생사, 푸른 하늘에 한 조각 떠가는 구름 같은데 / 편안했 던 세월들은 아주 오래된 옛날 같구나 / 하늘의 신이시여 빌고 비오니 부디 하늘에서 내려와 향기로운 음식들 많이 즐기시고 내 소원 이루도록 정말 도 와주시 옵소서】라며 제사를 올려 원령(怨靈)을 위로하여 더니 그 이후부터 아무런 변고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유천차기(柳川箚記)에 의하면 지금까지 사시행사(四時行祀)때마다 이 글을 제문에 쓴다고 한다. 그 뒤 충원(忠元)은 좌통례(左通禮)로 춘추관편 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명종(明宗) 21년(1566년) 이퇴계(李退溪)의 뒤를 이어 양관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선조(宣祖) 때, 우찬성(右贊成 : 조선 시대에, 의정부에 속한 종일품 문관 벼슬)·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후 지중 추부사(知中樞府事)로 밀원군(密原君)에 봉해졌다.


당시에 충원(忠元)의 아들 계현(啓賢)중종 38년(1543년) 진사가 된 후,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고 정자(正字) 등을 역임 1560년에는 세도가(勢道家) 윤원형(尹元衡) 청혼을 면전에서 거절하였다. 만포진병마첨절제사(滿浦鎭兵 馬僉節制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거쳐 대사헌 (大司憲)이 되었다. 그 때, 동·서인(東西人) 사이의 당쟁을 누르려고 힘썼으나 실패하였다. 1580년(선조 13) 병조(兵曹) 판서(判書)·중추부지사 (中樞府知事)를 지냈다.


계현(啓賢)의 손자가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승종(承宗)이다. 광해군(光海 君)의 폭정 속에서 영상(領相)에 올랐던 승종(承宗)은 항상 오리 알만큼 큰 비상을 차고 다니며 말하기를 "불행한 시대를 만나 하루하루 언젠가 죽기를 기다리는데 이 물건이 없어서 어찌, 되겠는가"할 정도로 광해군(光海君)의 비도덕적 행동이 많아, 항상 마음 진정하지 못하고 방안에 한가히 혼자 있 으면서 흐느껴 울기도 하여서면 때로는 폭주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던 날, 그는 이 반정에 참여하고자, 군사를 모 으고 있던 아들 자흥(自興 : 참판(參判)을 역임)을 불러 마음속에 있어든 한(恨)을 써 놓고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했다.


한편, 충원(忠元)의 6대손 성원(聖源)은 도암(陶菴) 이 재(李 縡)의 문인 (門人)으로 영조(英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간관(諫官)을 거쳐 참판(參判)으로 치사(致仕)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며, 문장(文章)에 뛰어나 예의류집(禮疑類集)·돈녕록(敦寧錄)·겸재집(謙齋集)등의 저서를 남겼다.


강계(江界)의 3대 유배명인으로 손꼽히는 시정(寺正) 빈의 셋째 아들, 근원 (謹元 :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천추사(千秋使)를 다녀옴.)은 나는 새도 떨 어트린 다는 당대의 권신 윤원형(尹元衡)와 암투로 일생을 살았다.

사관(史官)인 한림(翰林)의 벼슬에 있을 때, 윤원형(尹元衡)의 악행을 사초 (史草)에 적었더니, 동료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모두 지워버리자, 근 원(謹元)은 다시 쓰고 또 쓰기를 수십 차례 반복 하자, 결국에는 미움을 받 아 선조(宣祖) 때, 동서 분당으로 논쟁이 심해지자, 중진(重鎭)으로 송응개 (宋應漑)·허 봉(許篈) 등과 함께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있던 이 이(李珥) 를 탄핵하여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가 영의정(領議政) 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풀려나와, 청한직(淸閑職)을 지내며 청백리로 소문이 났었다.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의하면 늙어서 사람들이 그의 청백함을 칭송하자 "나의 청백은 윤원형(尹元衡)이 만들어 준 인생의 선물이다" 라면 웃었다.


복야공파(僕射公派)언인(彦仁)의 후손에서는 우리나라 <삼대악성(三大樂 聖)으로 손꼽히는 난계(蘭溪) 연(堧 : 언인(彦仁)의 9세손)이 뛰어났다.

우왕(禑王) 4년(1378년) 삼사좌윤(三司左尹) 천석(天錫)의 맏아들로 태어 나 태종(太宗) 초에 문과에 급제한 연(堧)은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악학 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調律)정리와 악보 찬집(樂譜撰集)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편경(編磬) 12매를 제작, 자작한 12 율관(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音律)로 연주케 했고, 조정의 조회(朝會) 때, 사용하던 향악(鄕樂)을 폐하고 아악(雅樂)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 하는 등 궁정 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세종(世宗) 27년(144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인수부윤 (仁壽府尹)과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 提學)에 올랐으며,

단종(端宗) 원년에 일어난 계유정난(癸酉靖難)때, 그의 셋째, 아들 계우(季愚)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반대하던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으나 그는 3조(三朝)에 걸친 원로로서 죽음을 면하고 벼슬 에서 물러나 낙향(落鄕)하였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조선 세종(世宗) 초에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나갔다가 전사한 홍신(弘信)과 돈인(敦仁)의 아들 한주(漢柱)가 유명했다. 한주(漢柱)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연산군(燕山君) 때, 간관(諫官)이 되어 직언(直言)을 하다가 무오사 화(戊午士禍)에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연 산조 고사말본>에 의하면 그는 말이 곧고 간결하였고, 예천군수(醴泉郡守) 로 나갔다. 치적(治績)을 쌓아 연산군(燕山君)이 그를 불러 간관(諫官)으 로 임명하였는데, 하루는 왕에게 직언하기를 "후원에서 말을 달리고 공을 치며 용봉장막(龍鳳帳幕 : 용과 봉의 형상을 아로새겨 임시로 꾸며놓은 왕 의 의자)을 펼쳐 놓고 잔치 놀음하는 때가 많으니, 임금께서 어찌 이러한 정사를 하십니까"하자, 연산군(燕山君)이 노하여 답하기를 "용봉장막이 네 물건이냐"하였다. 이에 한주(漢柱)는 "이것은 모두 백성의 재력에서 나온 것이니, 신민(臣民)의 장막이라 해도 옳을 것입니다. 어찌 임금님의 사사로 운 물건입니까"하였다. 이 일로 해서 노사신(盧思愼)과 임사홍(任士洪)이 아부하여 논하니 마침내, 그들에게 무함(誣陷)을 당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수(麟壽)의 아들 진(晋)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름난 명장(名將)  으로 임금이 항상 "나는 박 진(朴晋)이 싸움을 가벼이 여겨 죽을까 두렵다" 또는 "형세를 보아서 진퇴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박 진(朴晋)은 이것을 헤 아리지 못하고 전진만 하는가" 하며 걱정을 해주었다고 한다.


사옹원첨정(司饔院僉正) 사동(思東)의 아들로 중종(中宗) 때, 우찬성(右贊 成)에 오른 열(說)의 증손 효남(孝男)은 선정(善政)으로 가는 곳마다 송덕 비(頌德碑)가 세워졌고, 대덕(大德)은 강동(江東)에 유배당한 조 호익(曺好 益)에게 글을 배우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스승을 따라 다니면서 의병 (義兵)을 모집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70세가 넘는 고령으로 양덕(陽德)에서 독전(督戰 : 싸움을 감독하고 사기를 북돋아 줌.) 으로 적을 물리쳐서 관군을 놀라게 했다.


숙종(肅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권(權)은 경상도와 평안도의 관찰사(觀察使)를 거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淸)나라를 다녀왔고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올라 청나라 사신(使臣) 목극등(穆克登)의 접반사 (接伴使)로 백두산(白頭山)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청나라와의 국경을 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조선 실학(實學)의 태두(泰斗) 제가(齊家)는 19세 때, 박 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이 덕무(李德懋)·류 득공(柳得恭)·이 서구(李書 九) 등과 더불어 <시문4대가(詩文四大家)>로 일컬어졌으며, 실사구시(實 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한 북학의(北學議)를 작성하여 그를 바탕으로 기구와 시설의 개편, 불합리한 제도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구한말(舊韓末)에 와서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문경(聞慶)에서 의병(意兵)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했던 세화 (世和)가 학문과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중빈(重彬)은 1943년 대법문 (大法門)을 아직까지 설명이 계속되고 있다.

한일합방(韓日合邦) 이후 의병을 모아 항일운동(抗日 運動)에 앞장섰던 영철(永哲)과 함께 명문(名門) 밀양 박씨를 빛낸 불굴의 의인(義人)으로 손꼽혔다.

밀양 박씨는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261명,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 學) 2명, 청백리(淸白吏) 2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여 박씨 가문 가구수 946,307가구 중 밀양 박씨가 77.8%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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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박의 유래   ▣ 밀양 박씨(密陽朴氏) 기원과 나라를 빛낸 조상들 ▣ 밀성(密城) 또는 밀양(密城)은 지금의 경상남도(慶尙南道) 북동부(北東部) 에 위치한 밀양시(密陽市)를 지명(地名)하는 곳으로서 원래, 삼한시대 (三 韓時代)에 변진(弁辰) 24개국 중“미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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