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14일 목요일

성씨총람 - 밀양박씨(朴) -인물 소개


박(朴)씨


본관은 문헌에 30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시조 또는 중시조가 밝혀진 것은 70본 내외이며, 그 중 주요 본관은 밀양(密陽), 반남(潘南), 죽산(竹山), 함양(咸陽), 순천(順天), 고령(高靈), 무안(務安), 충주(忠州), 상주(尙州), 창원(昌原), 음성(陰城), 영해(寧海), 영암(靈巖), 진원(珍原), 고성(固城), 울산(蔚山), 운봉(雲峰), 춘천(春川), 비안(比安), 강릉(江陵), 월성(月城), 태인(泰仁), 면천(沔川), 삼척(三陟), 문의(文義), 장성(長城) 등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고 하며,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화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 왕실의 56대 세계(世系)는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는데, 그 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婆娑王)과 일성왕(逸聖王) 대(代)에서 갈라졌는데,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 면천, 강릉 등으로 분파 관적(貫籍)했고, 비안, 우봉(牛峰), 이산(尼山), 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라 한다.

한편 일성왕계는 그의 25대손인 경명왕(景明王), 경애왕(景哀王) 대에서 다시 갈라졌는데,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각기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밀양, 반남, 진원박씨 등),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고령박씨),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함양, 삼척박씨 등),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죽산, 음성, 고성박씨),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상주, 충주박씨),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전주, 무안박씨),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순천, 춘천박씨 등),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경주박씨)의 8대군파와, 국상공파(國相公派:울산박씨)로 분파되었다.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박씨를 8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김씨, 이씨와 함께 한국의 3대성의 하나이며, 1960년 국세조사에 36만 7271가구에 인구 211만 207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3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81만 5151 가구로 전국 가구 구성비 8.5 %로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3위였다.



본관 명열

  

강릉(江陵)      개성(開城)      경주(慶州)      고령(高靈)

 고성(固城)      공주(公州)      광주(廣州)      구산(龜山)

 군위(軍威)      나주(羅州)      노성(魯城)      면천(沔川)

 무안(務安)      문의(文義)      밀양(密陽)      반남(潘南)

 봉산(鳳山)      비안(比安)      사천(泗川)      삼척(三陟)

 상산(商山)      상주(尙州)      선산(善山)      성주(星州)

 순창(淳昌)      순천(順天)      여주(驪州)      영암(靈巖)

 영해(寧海)      운봉(雲峰)      울산(蔚山)      웅진(熊津)

 월성(月城)      은풍(殷豊)      음성(陰城)      음죽(陰竹)

 의창(義昌)      의흥(義興)      인제(麟蹄)      전주(全州)

 정선(旌善)      죽산(竹山)      진원(珍原)      창원(昌原)

 춘천(春川)      충주(忠州)      태안(泰安)      태인(泰仁)

 평산(平山)      평주(平州)      평택(平澤)      함안(咸安)

 함양(咸陽)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씨의 대종이며, 시조는 신라 경명왕의 제1왕자인 밀성대군 언침(彦)이다. 밀양박씨는 박씨 인구의 70~80 %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 계보도 상당히 복잡하다. 밀양박씨의 세계는 밀성대군의 7대손인 언부(彦孚: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를 중시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사사공파(都評議使司使公派),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판도공파(版圖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등으로 대별되고, 각 파는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또 여러 파로 분파된다. 예컨대 가장 규모가 큰 문하시중공파는 종파인 은산공파(銀山公派:永均), 행산군파(杏山君派:世均)를 비롯하여 좌상공파(左相公派:尙禮), 규정공파(糾正公派:鉉), 사문진사공파(四門進士公派:元), 밀성군파(密城君派:陟) 등으로 갈라지고, 이들은 또 여러 파로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규정공파가 밀양박씨의 분파 중 가장 후손이 번창하다. 또 규정공파에서 나누어진 파 중에서 특히 낙촌공파(駱村公派:忠元), 강수문도공파(江文度公派: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밀양박씨는 조선에서 문과급제자 261명,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2명, 청백리(淸白吏) 2명을 배출하였다. 밀양박씨의 대표적 인물을 열거하면 규정공파에서 강생(剛生), 심문(審問), 중손(仲孫), 건(楗), 훈, 충원(忠元), 계현(啓賢), 승종(承宗), 영(英), 성원(聖源) 등이 있고, 사문박익(朴翊/1332~1398)고려 말기의 충신. 본관 밀양(密陽). 호 송은(松隱). 공민왕 때 동경판관(東京判官), 예부시랑을 거쳐 공양왕 때는 상장(上將)으로 아장(亞將) 강회중(姜淮中)과 함께 남정북벌(南征北伐)에 공이 컸다. 고려가 망하자 아우 천경(天卿)과 함께 밀양 송계(松溪)에 은거하여 저술에 전념하였다. 1395년 이태조(李太祖)가 4년 동안 출사(出仕)를 기다리다 못해 공조판서 등으로 임명하여 5차례나 소환하였으나 일체 불응하고 고려의 유신(遺臣)된 도리를 다하였다.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등 명유(名儒)들과 친교가 두터웠다. 문집 《송은문집(松隱文集)》이 있다.

진사공파에서 의중(宜中), 거겸(居謙), 종남(宗男)과 영신(榮臣) 부자, 연(堧), 열(說)이 있으며, 밀성군파에서 신규(信圭), 이서(彛敍) 등이 있다. 상기 인물 중에서 충원은 명종 때 대제학을 지냈고, 승종은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인조반정 후 자결하였으며, 열은 중종 때, 신규는 숙종 때의 청백리이다. 이 밖에 밀양박씨의 두드러진 인물로서 실학(實學)의 대가 제가(齊家)가 있다.



이름난 선조


박강생(朴剛生/1369~1422)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유지(柔之). 호 나산경수(蘿山耕).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1392년 조선 개국 때 호조전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408년(태종 8)에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12년 인주지사(仁州知事) 재임시의 부정사건으로 태형(笞刑)을 받았으며, 17년 수원부사 재임시 과천현감 윤돈(尹惇)의 전별연에서 금천현감(衿川縣監) 김문(金汶)이 과음으로 죽은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재등용되어 세종 때 안변부사를 지냈다. 죽은 뒤 24년(세종 6) 딸이 후궁[莊懿宮主]이 되어 1품직에 추증되었다. 문장이 유려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박거겸(朴居謙/1413~1481)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 밀양(密陽). 자 중공(仲恭). 시호 평간(平簡). 1432년(세종 14) 음보(蔭補)로 별시위(別侍衛)가 되고 42년 호군(護軍)으로 무과에 장원하여 대호군에 올라 북청부사 등을 지냈다. 51년(문종 1) 경흥부사(慶興府使) 재임시 야인(野人)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55년(세조 1) 중추원첨지사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57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지낸 뒤 안주목판사(安州牧判事)를 거쳐 65년 다시 중추원부사가 되었으나 친상(親喪)으로 사직했다.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지내고, 81년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박건(朴楗/1434~150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자계(子啓). 시호 공간(恭簡).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수찬, 교리(校理)를 거쳐 사정(司正)을 지냈다. 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었으며, 우부승지를 거쳐 68년(예종 1)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72년(성종 3) 진하부사(進賀副使)로, 83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평안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내고 95년(연산군 1) 우참찬으로 춘추관지사(春秋館知使)를 겸하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04년 폐비 윤씨의 추시(追諡)를 반대하여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06년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에 임명되었으나 박원종(朴元宗) 등과 반정(反正)에 참여하여 중종을 추대,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그 후 좌찬성, 영경연사(領經筵事)를 지냈다.


박경지(朴敬祉/1610~1669)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밀양(密陽). 자 형보(亨甫). 1635년(인조 13)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무과중시에 장원, 여러 무과직을 거쳐 43년(인조 21)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이어서 전라남도, 경상좌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60년(현종 1)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6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69년에는 한성부좌윤 등을 거쳐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박계강(朴繼姜/?~?)

조선 후기의 문장가. 본관 밀양(密陽). 호 시은(市隱).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의하면 40세까지 글을 깨우치지 못하다가 길거리에서 천예(賤隸)에게 수모를 당하고 분발하여 수년 만에 문명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던 김정(金淨)과 교유하였으며, 풍월향도시인(風月香徒詩人)의 한 사람이었다. 작품으로 《증인(贈人)》 등 3수가 남아 있다. 홍세태(洪世泰)의 《해동유주(海東遺珠)》에는 박계강의 시가 제일 첫머리에 실려 있다.


박계현(朴啓賢/1524~158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군옥(君沃). 호 관원(灌園). 시호 문장(文莊). 1543년(중종 38) 진사가 된 후 52년(명종 7)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정자(正字) 등을 역임하고 55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60년에는 권신 윤원형(尹元衡) 집안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만포진병마첨절제사(滿浦鎭兵馬僉節制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그 때 동, 서인(東西人) 사이의 당쟁을 누르려고 힘썼으나 실패하였다. 80년(선조 13) 병조판서, 중추부지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밀산세고(密山世稿)》가 있다.


박관수(朴寬洙/1897~1980)

교육자, 반공운동가. 본관 밀양(密陽). 호 금계(琴溪). 경남 울산 출생. 1922년 일본 도쿄[東京]제국대학 철학과를 수료하고 39년 경기고등여학교 교장, 52~57년 경북대학 교수 및 대전고등학교 교장, 61년 한양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 후 교직을 떠나 65년 단군정신선양회장, 69년 공산권문제연구소 이사장, 72년 전북매일신문 회장 등을 지냈으며, 홍조근정(紅條勤政)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인간적 혁명론》 《북한의 농민》 《북한의 노동자》 《북한의 가정과 부녀자》 《현대한국반공투쟁사》 《국민독본》 《위대한 시대에의 도전》 등이 있다.

박광영(朴光榮/1463~15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군당(君棠).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급제하고 95년(연산군 1) 생원으로 숭불(崇佛)했다는 죄로 장류(杖流)되었다 풀려났다. 98년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이어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504년 정언(正言)으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추숭(追崇)을 반대하여 목천(木川)에 유배되었으나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정언에 복직, 지평(持平) 등을 거쳐 대사간, 병조참의를 지냈다. 18년 관압사(管押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22년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도적을 토벌하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 26년 이조참의로 등용되었으며 28년 좌승지를 거쳐 한성부우윤이 되었고, 이듬해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지고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박권(朴權/1658~17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형성(衡聖). 호 귀암(歸菴). 1684년(숙종 10) 사마시에 급제하고 8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전적(典籍)을 지낼 때 윤의제(尹義濟) 등의 처벌이 가볍다고 논핵하다 도리어 이산(理山)에 유배되어 92년 풀려났다. 94년 갑술옥사로 병조좌랑이 되었고 정언(正言) 등을 거쳐 동래부사를 지냈다. 1703년 경상도관찰사에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11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2년 한성부우윤으로 있을 때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의 접반사(接伴使)로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그 후 청나라 사신의 원접사(遠接使)를 거쳐 대사헌 등을 지내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박근원(朴謹元/1525~158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일초(一初). 호 망일재(望日齋).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조좌랑, 도승지 등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69년(선조 2)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75년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논쟁이 분분할 때 동인(東人)의 중진이었다. 85년 동서의 조정에 나선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사소한 직무상의 과실을 들어 송응개(宋應漑), 허봉(許) 등과 함께 탄핵하다가 도리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는데, 85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풀려났다. 이 사건을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한다. 당쟁으로 유배된 경우는 계미삼찬 사건이 시초이다.


박기호(朴基鎬/?~184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호 양우(養愚). 15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였으며, 성격이 침착하고 청렴결백하였다. 노부모와 가난 때문에 과거보는 것을 단념하였다. 1825년(순조 25)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올라 직장(直長)에 이르렀으며 37년(헌종 3) 증산현령(甑山縣令) 재임시에 선정을 베풀었는데 현령을 물러날 때는 눈물을 흘리며 고별하는 백성이 10리길을 메웠다고 한다. 곳곳에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으며 후에 현륭원령(顯隆園令)이 되었다.


박길응(朴吉應/159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덕일(德一). 호 진정재(眞靜齋). 음보(蔭補)로 찰방(察訪)이 되어 1634년(인조 1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38년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지평(持平),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 때 집의(執義), 승지(承旨) 등을 거쳐 참판에 이르렀다. 편저서에 《학안록(學顔錄)》이 있다.


박대덕(朴大德/1563~1654)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 밀양(密陽). 자 사화(士華). 호 합강(合江). 조호익(曺好益)의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조호익이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 5백여 명을 모집해 싸우는 등 수차 공을 세워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70의 고령으로 출정치 못하고 피난 도중 양덕(陽德)에서 적을 만나 일행을 독전해 적을 물리쳤다. 48년 부사(府使) 이정남(李井男)이 그 공적을 조정에 보고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김육(金堉)의 천거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대사헌에 추증되고 성천(成川) 학령서원(鶴翎書院)에 제향되었다.


박명부(朴明/?~?)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여승(汝昇). 호 지족당(知足堂). 정한강(鄭寒岡)의 문인.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 예조참의(禮曹參議), 감사(監司)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晉州) 싸움에서 분전, 장렬히 전사하였다.


박명진(朴明鎭/1903~1958)

한국 근대의 치과의사. 본관 밀양(密陽). 1930년 경성 치과의학전문학교(齒科醫學專門學校)를 졸업하고 동교 조교(助敎)가 되었고 37년에 조교수로 승진하였으며, 43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45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장에 취임하였으며, 유언으로 사유재산 전부를 대한 치과의학협회에 기증하여 치과의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논문으로 <창연제(蒼鉛劑)와 연제투여가토(鉛劑投與家)의 구강문기관(口腔門器官)에 대한 창연과 연침착(鉛沈着)에 관한 분광경적(分光鏡的) 검색(檢索)에 관하여>가 있다.


박문오(朴文五/?~?)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밀양(密陽). 자 대화(大化). 호 성암(誠菴).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서 경학(經學) 연구에 전념하는 한편, 서당을 지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고종 때 관찰사 남정철(南廷哲)이 기자묘수호소(箕子墓守護所)를 설치하고, 도내에서 학문과 덕망이 높은 인사를 뽑는 자리에서 입직수호생(入直守護生)과 주학교수(州學敎授)로 임명되자 사퇴하였다가 마지못해 보름 동안 일하였다. 당시 관서(關西) 제일의 학자로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문하에서 박은식(朴殷植)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문집 《성암문집(誠菴文集)》이 있다.


박문일(朴文一/1822~189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밀양(密陽). 자 대수(大殊). 호 징암(懲菴), 운재(雲齋), 운암(雲菴). 시호 문헌(文憲).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다. 도사(都事), 집의(執義),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평안도 태천(泰川)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평안도 일대, 특히 태천, 정주(定州) 등지에 그의 제자들이 많이 있어서, 각 지방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자주 서울에 출입하였으나 권문(權門)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문집으로 《운암집(雲菴集)》이 있다.


박병하(朴炳夏/1847~1910)

순국지사(殉國志士). 본관 밀양(密陽). 자 문혁(文赫). 전북 고창(高敞) 출생. 1910년(융희 4)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자 외국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하여 자결하였다. 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박봉령(朴鳳齡/1671~17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공서(公瑞). 1699년(숙종 25)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사간원정언을 비롯하여 삼사와 이조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708년에는 경상도암행어사로 나갔다. 16년 전라도관찰사, 승지, 이조참의, 대사성을 거쳐 예조참판까지 승진하였다. 국왕의 잘못을 강직하게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하였다고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13년에 국왕에게 존호(尊號)를 바치는 논의에서는 소신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다.


박상진(朴尙鎭/1884.12.7~1921.8.11)

독립운동가. 본관 밀양(密陽). 호 고헌(固軒). 경남 울산(蔚山) 출생. 1910년 국권피탈 후 대구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활동하였으며, 또 채기중(蔡祺中), 유장렬(柳璋烈)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단에도 가담하였다. 16년 노백린(盧伯麟), 김좌진(金佐鎭) 등을 대한광복단에 가입시켜 광복단(光復團)으로 개칭한 후,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채기중 등과 함께 친일파 부호 장승원(張承遠), 양재학(梁在學), 서도현(徐道賢) 등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하다가 실패하자 이들을 사살하는 등, 친일파 근절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서(朴瑞/1707~176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밀양. 자 성응(聖應). 호 주천(朱川). 1746년(영조 22) 참봉(參奉)에 임명되나, 나아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경학, 예학, 선불(仙佛), 복서(卜筮), 의약(醫藥), 천문, 지리, 재정(財政), 군사 등에 모두 통달하였다. 저서에 《대학구문통변(大學句問通辨)》 《중용구문통변(中庸句問通辨)》 《태극도변의(太極圖辨疑)》 《동유예휘(東儒禮彙)》 《상례상변(喪禮常變)》 《홍범연의(洪範演義)》 《고금성현총록(古今聖賢摠錄)》 등이 있다.


박선(朴璿/1668~170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성재(聖在). 호 도와(陶窩). 1696년(숙종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현감(縣監), 병조정랑(兵曹正郞),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경상도 인동(仁同)의 도완서원(陶浣書院)에 배향되었고, 《도와문집(陶窩文集)》을 남겼다.


박성(朴惺/1549~1606)

조선 중기의 학자, 의병. 본관 밀양. 자 덕응(德凝). 호 대암(大菴). 정구(鄭逑)의 문인. 배신(裵紳)에게 사사, 과거(科擧)에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 최영경(崔永慶), 김면(金沔), 장현광(張顯光) 등과 사귀었다. 정인홍(鄭仁弘)과도 친했으나 그가 대사헌에 올라 권세를 부려 절교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정유재란 때는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참모로 종군,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으로 활약했다.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뒤에 사포(司圃)가 되고 이어 공조좌랑(工曹佐郞), 안양현감을 지낸 후 모든 벼슬을 사퇴했다. 임진왜란 때의 활약이 《대암유사(大菴遺事)》에 실려 있다. 문집 《대암집》이 있다.


박성원(朴性源/1697~176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밀양(密陽). 자 사준(士濬). 호 포암(圃菴).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예학(禮學)에 뛰어났고 음운학(音韻學)에도 밝았다. 저서에 《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 《화동협음통석(華東音通釋)》 《제례초(祭禮抄)》 등이 있다.


박성원(朴聖源/1697~175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사수(士洙). 호 겸재(謙齋), 광암(廣巖). 시호 문헌(文憲). 이재(李縡)의 문인. 1721년(경종 1) 생원이 되고, 28년(영조 4)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감찰(監察) 등을 지냈다. 44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유배되고, 46년 풀려났다. 세손강서원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世孫:正祖)을 보도(輔導)하였으며, 그 뒤 참판(參判)에 이르러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집 《겸재집》, 저서에 《돈령록(敦寧錄)》 《보민격언(保民格言)》 《돈효록(敦孝錄)》 등이 있다.


박세화(朴世和/1834.3.10~1910)

조선 후기의 의병. 본관 밀양(密陽). 자 연길(年吉). 호 의당(毅堂). 함남 고원(高原) 출생. 어릴 때 유학(儒學)을 배웠으며, 문명(文名)과 효도로 유명하였다.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내다가 사퇴하고 태백산에 들어가 수도(修道)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시해사건으로 분기하여 도사(都事) 윤응선(尹膺善)과 함께 경북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하다 체포되었으며, 그 후 석방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자 자결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수일(朴遂一/1552~1597)

조선시대의 시인. 본관 밀양(密陽). 자 순백(純伯). 호 건재(健齋), 명경(明鏡). 이황(李滉)과 경의(經義)를 토론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경임(盧景任)과 의병을 일으켜 참봉이 되었다. 97년 정유재란  때 전사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건재일고(健齋逸稿)》가 있다.


박수춘(朴壽春/1572~165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밀양. 자 경로(景老). 호 국담(菊潭).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아,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싸웠다. 1636년(인조 11) 병자호란 때도 의병을 모았으나 화의가 이루어져 입산, 숭정처사(崇禎處士)를 자처하며 학문을 닦았다. 정구(鄭逑) 등과 태극설(太極說) 등을 토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호조참의에 추증, 대구  남강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 《국담문집》, 저서 《독서지남(讀書指南)》 《학문유해(學問類解)》 《도통연원록(道統淵源錄)》 《동방학문연원록(東方學問淵源錄)》 《의례견문해(疑禮見聞解)》 등이 있다.


박수홍(朴守弘/1588~164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언유(彦裕).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이어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정랑(正郞)으로 춘추관기주관(記注官)을 겸직하였다. 27년 정묘호란 때 강화(江華)로 인조를 호종하고, 돌아와 금구현령(金溝縣令)으로 나가 전란의 피해복구에 힘썼다. 뒤에 예조참의(參議) 등을 거쳐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 임기를 마치고 상주(尙州)에서 죽었다.


박술음(朴術音/1902~1983)

교육자, 영문학자. 본관 밀양. 호 취하(醉霞). 서울 출생. 1924년 연희전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24~48년 휘문중학 교사 및 교장, 48~52년 연세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52년 사회부장관에 임명되었다. 55년 외국어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66~77년 동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대통령 특명의 문화사절단으로 동남아 여러 나라를 순방하였고, 70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저서로 《A New English Grammar》 《Present English》 《Spoken English Readers》 《Extract English》 《학습영문》 등이 있다.


박숭원(朴崇元/1532~159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상화(尙和). 시호 충정(忠靖). 군수 난(蘭)의 아들. 1564년(명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등용되었다. 병조좌랑, 강원도관찰사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 도승지를 지냈다. 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순국할 것을 맹세하고 선조를 호종, 보검을 하사받았다. 한성부판윤(判尹) 재임시 의주(義州)에서 병사하였다. 선조가 심히 애도하여 좌찬성(左贊成)에 추증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 밀천군(密川君)에 추봉되었다.


박승종(朴承宗/1562~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효백(孝伯). 호 퇴우당(退憂堂). 시호 숙민(肅愍). 판서 계현(啓賢)의 손자.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8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89년 봉교(奉敎)를 거쳐 지제교(知製敎), 병조정랑을 지냈다. 1600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부제학(副提學), 병조판서를 거쳐 10년(광해군 2) 형조판서, 의금부판사 등을 지냈다. 우의정, 좌의정에 이어 19년 영의정에 오르고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앞서 1612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윤인(尹) 등의 일당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저지하였으며, 17년 폐모론(廢母論)에도 극력 반대하였다. 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손녀가 광해군의 세자빈(世子嬪)이 되어 그 일족이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사실을 자책,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하였다. 관작이 추탈(追奪)되었으나,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박승휘(朴承輝/180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광오(光五). 호 사고(社皐). 시호 문정(文貞). 1829년(순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48년(헌종 14) 사성(司成)으로 교정낭청(校正郞廳)이 되어 《삼조보감(三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55년(철종 6) 대사간, 64년(고종 1)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문집 《사고집》이 있다.



박승휴(朴承休/1606~165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자미(子美). 성균관유생 때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하였다. 뒤에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을 거쳐, 1650년(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전적(典籍), 호조좌랑, 병조정랑 등을 거쳐, 55년 사간(司諫) 등을 역임한 뒤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지냈다. 59년 집의(執義)가 되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효자로 알려졌다.


박시창(朴始昌/1898~1986)

군인, 독립운동가. 본관 밀양(密陽). 경기 시흥(始興) 출생. 1920년 중국으로 망명, 41년 중국 황푸[黃a]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항일전(抗日戰)에 참전하였다. 45년 광복군에 편입되어 상하이[上海] 지대장(支隊長)이 되었으며, 8, 15광복 후 귀국하여 국군, 예비역소장이 되었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박신규(朴信圭/1631~168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봉경(奉卿). 호 죽촌(竹村). 시호 청숙(淸肅). 1652년(효종 3) 진사가 되고, 60년(현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전주판관(全州判官)으로 부임하였다. 선정(善政)을 베풀었기 때문에 임기가 끝났으나 백성들의 진정(陳情) 상소로 재임하였다. 뒤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역시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80년(숙종 6) 형조판서에 특진하고, 이듬해 아들 성의(性義)가 범한 죄로 인하여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좌천되었다. 곧 재등용되어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경술(經術), 문학에 힘쓰고, 서예(書藝)로도 이름이 높았다. 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다가 일찍 죽으니, 왕은 그의 죽음을 개탄하면서 유족에게 쌀 100섬을 하사하고 집을 마련해 주는 한편,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박심문(朴審問/?~145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신숙(愼叔). 호 청재(淸齋). 시호 충정(忠貞). 편모 슬하에서 장성하였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온서직장(司署直長)이 되었다. 1436년(세종 18) 친시(親試)문과에 급제하여 기주관(記注官)을 지냈다. 함길도절도사 김종서(金宗瑞)가 6진(鎭)을 개척할 때, 그 종사관(從事官)으로 야인(野人)에 대한 안무(按撫)에 힘썼다. 47년 평안도판관, 48년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53년(단종 1) 계유정난으로 김종서가 수양대군(首陽大君:世祖) 일파에게 살해되자, 칭병(稱病)하고 집에 있으면서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등과 화초를 가꾸고 시(詩)를 읊으면서 단종 복위를 모의하였다. 벼슬을 사양하다가, 56년(세조 2)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 오던 중 의주(義州)에 이르러 성삼문 등 6충신(忠臣)이 참형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울분 끝에 음독(飮毒) 자결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박언배(朴堰培/?~1632)

조선 중기의 공신. 본관 밀양. 자 국배(國培). 대제학 연(堧)의 5대손.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김장생(金長生)의 휘하에 들어가 청주, 충주싸움에서 공을 크게 세웠다. 32년 안주(安州)의 난 때 명나라 장군 모승록(牟承錄)에게 속하여, 유흥치(劉興治)를 토벌하다 전사하였다. 순조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이 추증되고,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박열(朴說/1464~151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열지(說之). 시호 문정(文靖). 1483년(성종 14) 생원이 되고, 8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감찰(監察), 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97년(연산군 3) 이조좌랑으로 문과중시(重試)에 을과로 급제하고, 공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509년(중종 4) 대사헌을 거쳐 좌참찬을 역임하고, 16년 우찬성에 이르렀다.


박영(朴英/1471~154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밀양. 자 자실(子實). 호 송당(松堂). 시호 문목(文穆). 일찍이 궁마술(弓馬術)을 익혀 무예(武藝)에 뛰어났다. 1487년(성종 18) 이세필(李世弼)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91년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하고, 이듬해 겸사복(兼司僕)이 되었다. 이어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성종이 죽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정붕(鄭鵬)의 문하에서 《대학(大學)》을 공부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뒤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에 갔다. 뒤에 강계부사, 의주목사, 동부승지(同副承旨), 내의원부제조(副提調)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게 되어 기묘사화를 모면하고, 이듬해 경상도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의술(醫術)에도 능하였다. 황간(黃澗)의 송계서원(松溪書院), 선산(善山)의 금오서원(金烏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 《송당집》, 저서 《경험방(經驗方)》 《활인신방(活人新方)》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가 있다.


박영신(朴榮臣/1578~162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밀양(密陽). 자 인보(仁輔). 시호 충장(忠壯). 1605년(선조 38)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웅천현감(熊川縣監)이 되고, 14년(광해군 6)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는 것을 반대하다가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오위장(五衛將)이 되고 경원부사(慶源府使)를 거쳐 풍천부사(豊川府使)로 갔다가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포로가 되었으나 끝내 반란군에 협력하지 않아 참살당하였다. 병조참판이 추증, 금천(金川)의 민충사(愍忠祠)에 배향되었다.


박용대(朴容大/184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성기(聖器). 서울 출생. 1865년(고종 2) 진사에 오르고 3년 뒤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1871년 홍무관부수찬에 이어, 평북감시(平北監試), 경시관(京試官), 충청우도암행어사, 응교를 거쳐 75년 호조참의를 지냈다. 1886년 이조참판, 88년 별시초시시관(別試初試試官), 한성좌윤, 이듬해 승정원일기청당상과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91년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94년 갑오개혁에 참여, 의정부교정당상(議政府校正堂上)에 중용되어 제도개혁에 힘썼으며 의정부도헌(都憲)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중추원의관칙임 4등이 되고, 97년 중추원의관칙임 3등, 이듬해 봉상시제조가 되었다. 99년 정2품 비서원경에 임명, 법규교정소의정관을 겸임하였다. 1900년(광무 4) 충청도관찰사, 03년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05년 법부대신(法部大臣), 06년 홍문관 학사, 규장각 제학이 되어 《문헌비고》를 편찬하였다. 국권피탈 후 남작(男爵) 작위를 받았다.


박용만(朴容萬/1881.7.2~1928)

독립운동가, 언론인. 본관 밀양(密陽). 호 우성(宇醒). 강원 철원(鐵原) 출생.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6년 헤이스팅스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고 1909년 네브라스카에서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하였다. 11년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이 되어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을 저작하고 이듬해 네브라스카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아 하와이로 가서 대한인국민회의 《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이 되었다. 14년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창설하였으며 17년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동맹회(弱小國同盟會)에 참석, 이듬해 《태평양시사(太平洋時事)》를 창간하였다. 19년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을 설립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이 되고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를 조직하였다. 25년 하와이에서 열린 국제신문기자대회에 한국인 대표로 참석, 활약하였으며 27년 국어교본을 편찬, 교포의 국어교육에 이바지하였다. 28년 베이징[北京]에서 흉한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박운(朴雲/1493~156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밀양(密陽). 자 택지(澤之). 호 용암(龍巖), 운암(雲巖). 선산(善山) 출생. 1519년(중종 14) 진사가 되고 명종 때 부사용(副司勇)을 지냈다. 만년에 이황(李滉)과 서신으로 연락하였고, 이황에게 저서인 《격몽편(擊夢編》 《자양심학지론(紫陽心學至論)》 등을 보내 정정(訂正)을 구했다. 죽은 뒤 이황은 갈문(碣文)을 지어 그의 학문과 덕행을 찬양하였다. 효행(孝行)으로 선조 때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구미의 월암서원(月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과행록(果行錄)》 《삼후전(三侯傳)》 《용암일기(龍巖日記)》 《위생방(衛生方)》 《용암문집(龍巖文集)》이 있다.


박위(朴  /?~?)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처음 우달치(迂達赤)로 등용되었다가 김해부사로 승진하였다. 왜구를 격퇴하고,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때는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崔瑩)을 몰아낸 뒤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함선 100여 척을 이끌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적선 300여 척을 불태웠다. 후에 자혜부판사(慈惠府判事)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문하부지사에 올라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지고 공신에 책록되었다. 90년(공양왕 3) 김종연(金宗衍)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풍주(豊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 회군(回軍)의 공신으로 녹권(錄券)과 녹전(祿田)을 받았다. 조선 건국 후에는 문하부참찬사를 거쳐 양광도(楊廣道) 절도사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그때 밀성(密城)의 소경 이흥무(李興茂)의 옥사가 있어 이에 관계한 혐의로 구금되어 대역죄로 몰리게 되었으나 태조의 호의로 석방되어 서북면 도순문사로 나갔다. 사헌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박윤묵(朴允黙/1771~184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사집(士執). 호 존재(存齋). 정이조(丁彛祚)의 문인. 정조와 영의정 김조순(金祖淳)의 신임을 받았고,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1835년(헌종 1) 평신진 첨절제사(平薪鎭僉節制使)로서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시문(詩文)에도 뛰어났으며 서예는 왕희지(王羲之), 조맹부(趙孟)의 필법을 이어받았다. 문집 《존재집(存齋集)》이 있다.

박융(朴融/?~1424)

조선 전기의 문인. 본관 밀양(密陽). 자 유명(惟明). 호 우당(憂堂).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1년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직무 태만으로 면직되었다가 뒤에 전한(典翰)에 기용되었다. 23년(세종 5) 이조정랑으로 강원도경차관(敬差官)을 지낸 후 군수에 이르렀다. 문집 《우당집(憂堂集)》이 있다.


박은춘(朴殷春/?~1598)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밀양(密陽). 자 명화(命和). 호 동계(東溪).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들어가 당포해전에서 적장(敵將)을 사살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선봉장이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연락이 두절된 진주성(晉州城)에 단신으로 뛰어가 사정을 정탐하여 보고하는 등 명장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 후 인동부사(仁同府使)에 임명되었다가 98년 노량해전에서 분전중 화살이 떨어져 창검으로 적을 무찌르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호조참의가 추증되고 흥양(興陽)의 봉암사(鳳巖祠)에 배향되었다.


박의중(朴宜中/?~?)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자허(子虛). 호 정재(貞齋). 초명 실(實).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장원, 전의직장(典儀直長)을 거쳐 헌납(獻納), 사예(司藝)가 되고, 우왕 때 문하사인(門下舍人),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대사성,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냈다. 1388년(우왕 14)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철령위(鐵嶺衛) 철폐를 교섭하여 성취하고 귀국, 창왕 때 공신(功臣)에 책록되고, 공양왕 때 한양(漢陽) 천도설이 대두되자 음양설(陰陽說)의 허황함을 지적하여 그에 반대, 뒤에 예문관제학 겸 대사성이 되었다. 92년(태조 1) 《고려사(高麗史)》 수찬에 참여하고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가 되었는데,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을 뿐 아니라 문장이 우아하였다. 문집 《정재집(貞齋集)》이 있다.


박이서(朴彛敍/1561~16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서오(敍吾). 호 비천(泌川), 동고(東皐). 시호 충간(忠簡). 초명 문서(文敍). 1588년(선조 21)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 군자감(軍資監) 참봉이 되고 92년에는 병조좌랑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순찰사(巡察使) 종사관이 되어 황해도 지방의 군량을 맡아보았다. 95년 정언(正言), 이듬해 황해도 독운어사(督運御史)가 되었다가 돌아와 정언, 교리(校理)가 되었다. 99년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어 여강(驪江)에 은거하였다. 1607년 대사령(大赦令)으로 복직되어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이 되었다. 광해군 초기에 사간(司諫)으로 등용되었으며 11년(광해군 3) 대사간에 이어 병조참지, 충청도관찰사,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 담양부사, 승지, 이조참판, 성균관동지사(成均館同知事),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13년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여러 차례 대북파(大北派)를 탄핵하다가 삭직되었다. 뒤에 서반직(西班職)으로 복직되고 영광군수로 나갔으나 전라도관찰사 이창준(李昌俊)의 탐학(貪虐) 행위에 실망하여 사직하였다. 그 후 다시 복직되어 20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실종되었다.


박인복(朴麟福/?~1595    )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 밀양. 후령(厚齡)의 아들. 뛰어난 무예(武藝)로 천거받아 사복시(司僕寺)에 보직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 아버지가 전사하자 의병을 모아 복수장(復讐將)으로 분전, 당항포(唐項浦)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가 되었다. 95년 판관(判官)으로 전라도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들어가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적탄에 맞고 전사하였다. 형조참판이 추증, 진도(珍島)의 효충사(孝忠祠)에 배향되었다.


박인호(朴寅浩/1855~1940)

독립운동가. 본관 밀양(密陽). 자 도일(道一). 호 춘암(春菴). 충남 예산 출생. 1883년 동학(東學)에 입도, 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7,000명의 교도를 이끌고 예산 홍주(洪州)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천도교의 도통(道統)을 계승, 제4대 대도주(大道主)가 되고, 19년 3, 1운동 때는 손병희(孫秉熙)를 도와 천도교측 독립투사들 연락에 힘쓰며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후에 동덕학교를 창립하였다. 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자흥(朴自興/1581~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인길(仁吉). 초명 흥립(興立).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딸이 세자빈(世子嬪)이 되자 설서(說書)에서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민전(民田)을 탈취하는 등으로 백성의 원망을 샀다. 정언, 사서, 형조참의 등을 거쳐, 참판(參判)에 올라 이이첨(李爾瞻)의 딸과 재혼하였다. 23년 인조반정 때 경기도관찰사로서 아버지 승종(承宗)과 같이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함께 자결하였다.


박정길(朴鼎吉/1583~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양이(養而).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 1606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등용되었다. 이어 사인(舍人)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18년 전한(典翰), 직제학을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그해 성절사 겸 진주사(聖節使兼陳奏使)로, 동지사(冬至使)를 겸하여 명나라에 다녀왔다. 20년 대사성, 공조참판을 지내고, 22년 문안사(問安使)로서 명나라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을 영접하고, 이듬해 병조참판을 지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앞서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한 일로 주살되었다.


박정로(朴廷老/1553~16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여헌(汝獻). 호 나학자(懶學者). 조헌(趙憲)에게 배워 예학(禮學)에 통달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막(廬幕) 생활을 하였다. 1612년(광해군 4)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다.


박정현(朴鼎賢/1561~16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중로(重老). 호 의곡(義谷), 응천(應川). 이산해(李山海)의 문인. 1588년(선조 21) 알성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어 임진, 정유의 난을 전후하여 사관(史官)으로 있었다. 이어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1601년 예조좌랑(佐郞)이 되고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년(광해군 8) 강원도관찰사, 18년 중추부동지사를 역임하고, 사은(謝恩) 겸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으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공조참판이 되었다. 25년(인조 3) 사은사로 세 번째 명나라에 다녀오고, 32년 형조판서, 중추부지사를 지냈다.


박제가(朴齊家/1750~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 밀양(密陽). 자 차수(次修), 재선(在先), 수기(修其). 호 초정(楚亭), 정유(貞), 위항도인(葦杭道人).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1776년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합작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78년(정조 2)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 등에게 새 학문을 배우고 귀국하여 《북학의(北學議)》 <내외편(內外篇)>을 저술, 이듬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고, 그 뒤 진하사(進賀使), 동지사(冬至使)를 수행,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94년 춘당대(春塘臺) 무과에 장원하여 오위장(五衛將)에 오르고, 이듬해 영평현감(永平縣監)으로 나갔다. 98년 《북학의》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하고, 1801년(순조 1) 사은사를 수행, 네 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사돈 윤가기(尹可基)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연좌로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났다. 저서에 《명농초고(明農草藁)》 《정유시고(貞詩稿)》 《유정집(亭集)》이 있다.

 

 
박제가


박종남(朴宗男/?~160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밀양.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1583년 이탕개(尼湯介)를 토벌한 공으로 절충장군에 올랐다. 이듬해부터 부령(富寧), 길주, 온성(穩城)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춘천부방어사로서 왜군의 북진을 막았고, 분조(分朝)의 동부승지, 병조참의를 지냈다. 93년 진주목사로 나갔으나, 관찰사와의 의견대립으로 파직되었다. 이순신(李舜臣)에 의해 주사조방장(舟師助防將)에 발탁되어, 한산, 장문(場門), 영등포, 견내량(見乃梁) 등의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뒤에 상주, 광주의 목사로 있다가 회령부사로 전임하였다. 대사헌 홍여순(洪汝諄)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박중손(朴仲孫/1412~146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경윤(慶胤). 호 묵재(黙齋). 시호 공효(恭孝). 15세 때 성균관시(試)에 합격하고,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에 급제, 집현전박사에 등용되었다. 부수찬(副修撰),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세종 말에 사인(舍人), 집의(執義), 병조지사(兵曹知事), 동부승지(同副承旨),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병조참판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을 도와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정난공신 2등에 책록,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 대사헌, 공조, 이조, 형조, 예조의 판서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올라 밀산군(密山君)에 개봉(改封)되었다. 59년(세조 5) 춘시(春試)를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발굴하였다.


박증영(朴增榮/1464~1493)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 밀양. 호 눌재(訥齋). 별명 희인(希仁). 1483년(성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86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88년 예빈시 직장과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였다. 예빈시 직장으로 있을 때 명나라 사신 규봉(圭峰)과 동월(董越)을 의주에서 맞이한 일이 있는데, 이때 동월이 그의 문장과 필법(筆法) 및 성품을 보고 희인(希仁)이라 부른 데서 별명이 되었다. 문장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송설체(松雪體)에도 능하였다. 청주의 국계서원(菊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눌재유고》가 있다.


박증휘(朴增輝/16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회중(晦仲). 호 낙정(洛汀). 1648년(인조 26) 문과에 급제하여, 54년(효종 5) 사헌부지평, 60년(현종 1) 이후 사헌부장령, 집의, 사간원정언, 사간 등 삼사의 관직과 세자시강원의 사서, 필선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61년 전남좌우도(全南左右道)에 어사로 파견되어 도망 노비의 추쇄 정책을 추진하였다. 효종대의 언론활동은 사족(士族)의 정치주도권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행하였다. 현종대의 예송(禮訟)을 중심으로 한 서인과 남인의 대립에서는 조경(趙絅)의 상소를 공격하는 등 서인 쪽에서 활동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과 서필원(徐必遠)이 대립할 때는 다수 서인과는 달리 송시열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민간의 예속과 부세를 바로잡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으며, 67년에는 청나라의 조사에 잘 대응하지 못한 대신을 공격하다가 해남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박지(朴贄/16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원례(元禮). 전생서(典牲署) 봉사가 되어 1662년(현종 3)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주로 사헌부, 사간원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것이 20년 가까이 되었고 나주목사, 공산현령(公山縣令), 사복시 정(正)을 거쳐 1687년(숙종 13)에 승지에 올랐다. 부정한 관인을 탄핵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 많았으며, 1671년 연해(沿海) 여러 읍의 기근을 극복할 대책을 건의하고 1681년에 평안도의 진보(鎭堡)에 소속된 내수사 노비의 신공(身貢)을 감하여 국방을 충실히 하자고 하는 등 국가정책을 많이 제안하였다. 반면에 1666년에는 공산현령으로 있다가 그 지역에서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사건으로 인해, 1673년에는 안동부사로 있던 중에 비(婢)를 첩으로 거느리고 그 말을 따라 정사를 행한 죄로 파직되기도 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권력을 잡을 때 권력자를 좇았다는 비판을 받고 판결사(判決事)에서 파직된 후 정계에 복귀하지 못했다.


박지병(朴之屛/1601~1684)

조선 중기의 관인. 본관 밀양. 자 여장(汝障). 아버지 영신(榮臣)은 1624년(인조 2) 풍천부사로 재임중 이괄(李适)의 난을 만나, 방어사 이중로(李重老) 등과 함께 반란군 장수 이수백(李守百)에게 잡혀 저항하다 피살되었다. 이수백이 이괄의 목을 베어 투항하여 죽음을 면하고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자, 동생인 지원(之垣), 지번(之蕃) 및 이중로의 아들 문웅(文雄), 문위(文偉) 등과 함께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을 계획하였다. 그가 두려움을 느껴 여주에서 두문불출하자, 스스로 죽었다는 헛소문을 내어 방심하고 관직을 구하러 서울로 올라오게 한 뒤 1634년에 기습, 살해하고 자수하였다. 김시양(金時讓) 등은 국법에 따라 살인죄로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오윤겸(吳允謙) 등 대신이 충신 아버지를 위해 역적을 친 것이라고 두호하여 조정에서의 논란 끝에 의성에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뒤에 천거받아 정릉참봉, 제용감봉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물러났다. 말년에 용양위부호군의 직함을 받았다.



박지서(朴旨瑞/1754~1821)

조선 후기 영남의 학자. 본관 밀양. 자 국정(國禎). 호 눌암(訥庵). 할아버지 정원(挺元)과 종숙 맹기(孟夔)에게서 배웠으며, 1774년 경기도 광주로 안정복(安鼎福)을 찾아가 《심경(心經)》의 의문점을 물었다. 유장원(柳長源), 김도행(金道行) 등에게도 경전의 뜻을 물었다. 99년 정조가 영남학자의 사적을 보고하라고 명령하자, 정종로(鄭宗魯)와 함께 그 일을 맡았다. 1811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도내에 격문을 돌려 토벌군을 모으려 하였다. 조식(曺植)을 문묘에 배향하고 김성일(金誠一) 서원을 건립하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문집 《눌암문집》, 편저 《태안박씨무첨록(泰安朴氏無錄)》 《동유심화(東儒心畵)》 《동현영적(東賢零蹟)》 등이 있다.


박진(朴晉/?~1597)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밀양. 자 명보(明甫). 시호 의열(毅烈) 1589년(선조 22) 심수경(沈守慶)의 천거로 등용, 선전관(宣傳官), 밀양부사(密陽府使)가 되었다. 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함께 소산(蘇山)을 지키다가 패하여 성안으로 돌아왔다가, 적병이 밀려오자 성에 불을 지르고 후퇴하였다. 이어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영천(永川)의 적을 야습(夜襲)하여 수천 명을 살해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봉해졌다. 또 안강(安康)에서 장군회의를 열고 16읍(邑)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쳤으나, 병사 약 500명을 잃고 후퇴하였다. 한 달 뒤 신예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퍼부어 경주성을 탈환하였다. 그 뒤 전라, 황해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참판에 이르렀고,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었다.


박진규(朴鎭圭/1633~169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정경(定卿). 음직으로 통덕랑의 품계를 얻은 뒤, 1674년(숙종 즉위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76년 이래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사간 직위에서 축출되었다. 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집의로 복귀하고 특별히 승지에 여러 차례 임명된 뒤, 90년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숙종 초년에 언관으로 있을 때 왕실의 전례를 그르친 죄로 송시열을 공격하였으며, 기사환국 뒤에는 이이와 성혼(成渾)을 문묘에서 내보내자는 입장의 언론 활동을 하는 등 남인의 입장에 서서 서인과 대립하였다.


박진영(朴震英/1569~164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밀양. 자 실재(實哉). 호 애서(厓西). 시호 무숙(武肅).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수 유숭인(柳崇仁)과 함께 의병을 모아 활약하였으며, 99년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승진, 변방을 잘 방비한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고, 19년 순천군수로 우영장(右營將)을 겸임하였다. 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해서도방어사(海西道防禦使)로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종군, 신경원(申景瑗)과 함께 동교(東郊)에서 대승하였다. 뒤에 평산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가 되어 해서방어사를 겸임하다가 퇴관하고, 여생을 탄금(彈琴)과 서예로 보냈다.


박충원(朴忠元/1507~1581)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밀양. 자 중초(仲初). 호 낙촌(駱村), 정관재(靜觀齋). 시호 문경(文景). 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31년 문과에 급제, 정자(正字)를 지냈다. 36년 교리(校理)로 원접사(遠接使) 종사관이 되었으며, 38년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일당으로 몰려 파직되었다. 41년 영월군수로 등용되었는데, 앞서 부임한 군수 7명이 연이어 급사한 영월에서 의연하게 지내, 죽었다가 소생한 군수라는 일화를 남겼다. 45년 중국사신 영접사로 활약한 뒤, 직강(直講), 성천부사를 거쳐 통례원우통례 겸 교서관판교가 되었다. 50년(명종 5)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우부승지를 지내고, 53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66년 이황(李滉)의 뒤를 이어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중추부지사(知事)가 되었다. 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김안로의 일파라는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71년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가, 훈구(勳舊)의 간당(奸黨)이라는 신진사류(士類)의 규탄을 받고 해임되었다. 재등용되어, 76년 이조판서, 중추부지사를 역임하고 밀원군(密原君)에 봉해졌다. 문집 《낙촌집》이 있다.


박치복(朴致馥/1824~189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밀양. 자 훈경(薰卿). 호 만성(晩醒). 유치명(柳致明), 허전(許傳)의 문인. 그의 학문의 목적은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밝히고, 척사위정(斥邪衛正)하는 데 있었으므로 성리학뿐 아니라 사회개혁에도 일정한 식견이 있었다. 응지대삼정책(應旨對三政策)은 임술민란 이후 이러한 관점에서 그가 제시한 대책문이다. 산행을 좋아하여 기행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문집에 《만성집(晩醒集)》이 있다.


박필정(朴弼正/168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계심(季心). 호 일휴(逸休). 1711년(숙종 3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8년 정언(正言)을 지냈다. 20년 장령(掌令)을 거쳐, 22년(경종 2) 사과(司果)로 있을 때 소론 김일경(金一鏡)의 탄핵을 받았다. 34년(영조 10) 판결사(判決事), 51년 사직(司直)을 역임한 뒤 한성부좌윤에 이르렀다. 숙종, 경종, 영조의 3대 20년 동안 줄곧 요직에 있으면서 신임을 받았으며, 정의감이 강하여 백성을 위한 정사를 펴도록 많이 주청(奏請)하였다.


박하담(朴河淡/1479~1560)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 밀양. 자 응천(應千). 호 소요당(逍遙堂).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여러 번 대과에 응시하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감역(監役), 봉사(奉事), 사평(司評) 등에 천거되나, 떳떳하지 못하다 하여 응하지 않았다.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기슭에서 풍류와 독서로 여생을 마쳤다. 청도의 선암사(仙巖祠)에 배향되었다. 문집 《소요당일고》가 있다.


박한주(朴漢柱/1459~150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천지(天支). 호 우졸재(迂拙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거쳐 예천현감(醴泉縣監)으로 나갔다. 연산군 때 간관(諫官)이 되어 왕의 실정(失政)을 극간(極諫)하고, 노사신(盧思愼), 임사홍(任士洪)을 탄핵하였다. 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 하여 벽동(碧潼)에 장류(杖流)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 서울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중종반정 후 도승지(都承旨)가 추증되고, 대구의 남강서원(南岡書院), 함안의 덕암서원(德巖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 《우졸재집》이 있다.


박호(朴  1567~159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대건(大建). 1584년(선조 17)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시험관 박순(朴淳)이 어린 나이에 장원이 된 것을 의심하여, 시간을 정하고 운자(韻字)를 불러 시험하니 즉석에서 시를 지어 그를 놀라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찬(修撰)으로 이일(李鎰)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상주(尙州)에서 싸우다가, 동료 윤섬(尹暹), 이경류(李慶流)와 함께 죽었다. 직제학(直提學)이 추증되었다.


박호원(朴好元/152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밀양(密陽). 자 선초(善初). 호 송월당(松月堂). 박이(朴苡)의 아들로,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55년에 함경남도평사에 올랐으며, 이후에 수찬(修撰), 헌납(獻納), 교리(校理), 전적(典籍) 등을 역임하였다. 전적으로 있을 때 이조낭관 홍천민(洪天民)이 그를 이조낭관에 추천했으나 명종은 평안도에 흉년이 심하여 훌륭한 인재가 필요하다 하여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파견하였다. 명종 후반에 임꺽정을 두목으로 하는 도적들이 극성하자 이들을 토벌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이들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고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 1565년 장령(掌令)이 되고, 이후에 승지직을 주로 거쳤으며, 76년 대사헌, 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박홍신(朴弘信/1363~1419)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본관 밀양. 12세에 이미 말타고 활쏘는 데 능하였다.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을 거쳐, 산원(散員)에 올라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 휘하에 들어갔다. 1386년(우왕 12) 별장(別將)으로 승격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금군(禁軍)에 속하였다. 사직(司直), 호군(護軍)을 거쳐, 1414년(태종 14) 제물량(濟物梁), 병산포(竝山浦) 등의 만호(萬戶)를 역임하였다. 18년 사재감정(司宰監正), 이듬해 좌사금(左司禁)이 되었다. 19년(세종 1) 대마도 정벌 때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서,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실(朴實)의 휘하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박훈(朴薰/1484~15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형지(馨之). 호 강수(江). 시호 문도(文度).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학문에 힘써, 1504년(연산군 10) 사마시에 급제하여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가 되었다. 이어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다. 감찰(監察), 공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持平)을 지냈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 장령(掌令),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다. 그해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 등과 연좌되어, 성주(星州)에 유배된 뒤 의주, 안악(安岳)에 이배(移配), 30년 풀려났다. 관직에 있을 때 가는 곳마다 치적을 올려 명망이 높았고, 조정에서는 나라의 인재로 여겼으나, 간신들의 질시(嫉視)로 심한 비방을 받았다. 특히 조광조와 친해서 큰 일을 의논하였고, 청렴한 관원으로 일생을 지냈다.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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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씨총람 - 밀양박씨(朴) -인물 소개 박(朴)씨 본관은 문헌에 30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시조 또는 중시조가 밝혀진 것은 70본 내외이며, 그 중 주요 본관은 밀양(密陽), 반남(潘南), 죽산(竹山), 함양(咸陽), 순천(順天), 고령(高靈), 무안(務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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