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버풀의 왕.결정력의 왕.
케니 달그리쉬(Kenneth Mathieson Dalglish MBE) 리버풀의 왕이 누구냐고 질문한다면 오직 대답으로 말할 수 있는
남자다. 엔필드에서는 그 무엇보다 숭배되던 킹으로서 또한 콥들에게는 언제나 죽지않는 영웅으로서 그를 말할 수 있다.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위대했던 그였고 영국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은 그였다.
1977년 8월 그는 리버풀 풋볼 클럽(Liverpool Football Club)에 들어왔다. 그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이라는 중대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왔다. 많은 전문가들과 팬들은 그가 셀틱에서는 성공했지만 리버풀에서의 성공은 힘들것이라고 예상했다. 결과는 틀렸다. 향후
13년간 그는 축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잊지못할 활약을 리버풀에서 해냈다.
그는 클럽에 들어올때 리버풀에 약간 문제가 생겼다. 콥들의 아이돌이었던 케빈 키건(Kevin Keegan)이 함부르크로
떠나면서 전문가들은 리버풀의 전성기에는 위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때 킹케니가 리버풀에 도착한 것이다. 그에게는 어쩌면 중대한 임무였다. 케빈
키건은 리버풀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인데 킹케니에게 그의 공백을 매우라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부담가는 임무였을 지도 모른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Manchester United Football Club , 이하 맨유)와의 채리티 쉴즈(Charity
Shield)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뤘다. 시작부터 대단했다. 그리고 그는 리그개막전인 미들스브로와의 경기에서 출장한지 단 7분만에 공을
네트에 집어넣었다. 단 7분만의 리그 데뷔골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원정골이다. 그런뒤 드디어 그는 엔필드에서 첫 출장을 하였고 그 경기에서 또
골을 넣었다. 뉴케슬과의 경기였다. 이경기는 2-0승리를 리버풀리 거두어 갔다.
그는 순조롭게 아니 영웅적으로 1977/1978시즌을 시작했고 그는 그의 첫번째 트로피를 엔필드로 가져오는 임무를 성공시켰다. 1978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치루어졌던 유로피언컵(오늘날의 챔피언스리그)결승전 이었는데 그는 경기의 유일한 골을 넣으면서 리버풀에게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전문가들이 예상했던 시즌 실패는 허무하게 그의 활약으로 끝나버렸다. 이 골은 그냥 심플하게 넣었던 골이고 모든이가 골이라고 생각할때 그의
피니싱능력을 살려서 넣은 골이었다.
그는 단순히 골을 잘넣는 스트라이커가 아니었다. 그의 드리블 스킬은 월드클래스 그 자체였다. 그냥 설명히 된다. 그는 환상적인 시즌을
단순히 골로만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가 단지 케빈키건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왔다는 것이 아닌. 케니 달그리쉬가 누구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콥들에게 알린 것이다. 그의 플레이는 가장 깔끔하고 현대적인 플레이였다고 설명이 가능하다.
그는 그렇게 시즌을 다시 시작했다. 당시 유럽최강이었던 리버풀의 승리의 함성은 끝나질 않았고 그는 또다른 완벽한 활약을 통해서
리그트로피를 엔필드로 가져왔다. 당시 리버풀에 우승트로피는 당연한 상황이었으니 별로놀랄일은 아니었지만 콥들으 킹의 활약이 대단했었다. 그냥
대단하다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영국북부지역이 탄생시킨 최고의 스트라이커는 리버풀을 완벽하게 이끌었다. 리그우승의 효과는 그대로 이어졌고
1979년에는 스코틀레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리버풀의 미래가 밝다는 것을 증명해낸 것이다.
그래도 만족하지 못한 리버풀은 1980년 여름 케니에게 최고의 파트너를 이적시켜준다. 파트너의 이름은 '무한 득점기계 이안 러쉬(Ian
Rush)' 인데 이안 러쉬의 리버풀이적은 현재축구에 까지도 큰 영향력이 있는 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유는 바로 '러쉬 - 케니'
투톱체제인데 러쉬의 무한 득점력과 케니의 천재적인 창조플레이는 찰떡궁합이었다. 현대축구에서도 감독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투톱이다. 투톱의
별명은 'Fantasy Football teamsheet' 이었다.
그는 1983년도 까지 완벽한 활약을 했다. 81/82시즌 리그우승 82/83시즌 리그우승 리그 2연패를 달성한 것이다. 이런 우승행진은
83/84년도까지 이어가지만 83년도는 특별하다. 그는 올해의 세계 더블플레이어에 선정되었다. 또한 그는 브리티쉬 최고의 선수상까지 받았는데 이
두상은 마라도나, 지코, 플라티니등 선수들과 견주어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증표와 같은 상들이었다.
킹케니의 발에서 나온 172골중에서는 특별한 골들이 많다. 유로피언 컵(챔피언스리그) 골을 포함해 아스날 원정골. 구디슨파크와 포트먼
로드에서 나온 결승골, 맨유 원정에서 승리로 이끈 골, FA컵에서 토튼햄을 상대로한 환상적인 발리골 또다른 FA컵 첼시와의 결승전에서 나온 골등
그는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데 가장 중요한 골을 언제나 성공시킨 것이다. 그가 킹케니인 이유는 단순한 골이아닌 가치가 있는 골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는 이런 영웅적인 기질을 끊임없이 보여주었고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엔필드에서 그의 배너를 언제나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어느정도 약간의 부진하는 시즌이 있어야 정상인데 그는 대단하게도 부진이라는 말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활약을 해냈다. 그의 유일한 부진은 평점이 낮은 것이 아닌 공격포인트가 없는 날이었다.
전세계의 모든 축구팬들이 행해서는 안되는 참사인 헤이젤 참사. 유벤투스와의 유로피언컵(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승부에 눈이먼 리버풀
훌리건들이 폭도로 변하여 일어난 참사이다. 킹케니는 이참사이후 리버풀 감독을 맡았는데, 이는 그의 선수생활의 끝이 아니었다.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 선수겸 감독역할을 하게된 것이다. 그는 감독역할을 뛰어나게 해주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85/86시즌에는 리그컵 트로피와 FA컵
트로피를 가져오면서 감독적인 역량도 증명해냈다.
그는 시즌이 지날때마다 축복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감독벤치에서 리버풀의 생활을 즐기는 때가 더 많아졌다. 그는 리버풀을 계속 감독해
나갔다. 그는 헤이젤참사로 인한 팀붕괴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주전선수의 이탈로 떨어진 리버풀의 축구레벨을 다시 끌어올렸다. 대단한
성과이다.
그는 결국 선수생활을 은퇴하였다. 그의 은퇴식에서는 172골 즉 달그리쉬가 성공시켰던 모든 골들이 방송되었으며 머지사이드의 밤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라이벌팀인 에버튼에서도 찬양을 받았고 심지어 맨유팬들도 그의 은퇴식에서는 그를 절대 욕할 수가 없었다. 많은 팬들은 그의 은퇴에
눈물을 흘렸고 박수를 쳐주었으며 그의 은퇴식은 도저히 끝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리버풀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로서 찬양받았으며 1군
515경기 출장하여 172골을 넣었다.(평균득점력 0.33)
감독으로서 남은 축구인생을 보냈다. 셀틱, 뉴캐슬 유나이티드, 블랙번 로버스등의 팀을 감독으로 보냈는데 그중 블랙번 로버스는 앨런시어러
돌풍과 함께 리그 정상에 올려놓았다. 절대 감독으로서 실패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축구계에서 완전히 은퇴를 했다. 이제 그를 축구계에서 볼
수는 없지만 전세계 축구팬들은 그가 누구인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가장 강했던 남자. 가장 천재적인 남자. 언제나 축구를 즐겁게 했던 남자.
King 케니 달그리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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